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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남도의 새벽에 묻는다

 

남도의 새벽에 묻는다

 

신축년 벽두, 남도는 지금 하얀 설국(雪國)이다. 헐벗은 대지가 눈 이불속에 포근히 잠들어 있다. 소백산맥의 줄기인 무등산, 월출산은 들짐승처럼 낮게 허리를 굽히고 잔뜩 웅크리고 있다. 그러나 갈기갈기에는 잔설이 쌓여 칼날처럼 결연한 기상을 드러내고 있다. 영산강은 은백의 영토를 헤치고 제 물길을 가느라 숨이 가쁘다.
지난 경자년 한 해 코로나로 만신창이가 된 남도의 대지는 신축년 새아침 다시 순결하게 가슴을 열었다.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시는 늙은 어머니의 손길이 우리의 지치고 야윈 마음을 다둑인다.

 

한(恨)과 신명의 땅 전라도

 

남도의 질긴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가. 한(恨)과 신명이다. 한(恨)은 억눌림이요, 신명은 떨치고 일어남이다. 수천년 극과 극의 에너지가 분출돼온 곳이 남도땅이다. 대지에 귀기울여 보면 백제의 말발굽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서해 바다에선 장보고의 기상이 찬란히 빛나고 있다.
고려시대 항몽전쟁의 마지막 불꽃이 피어난 곳이 반도 남단 진도이며, 조선시대 임진왜란이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켜낸 곳 역시 전라도이다. 이순신 장군이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 언급한 것은 호남의 역할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는가를 말해준다.
구한말 이래 100여년간 한반도에서 가장 변곡점이 높았던 곳이 전라도이다. 전북 고부에서 발화돼 들불처럼 번진 동학농민운동, 제주 4‧3항쟁 진압을 거부하다 피의 이념대결로 얼룩진 여순사건, 전두환 군사독재에 분연히 맞서 싸운 광주 5‧18항쟁이 모두 남도땅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이다. 뿐만아니라 5년전 박근혜를 탄핵시킨 촛불혁명 역시 호남인이 가장 앞장 서서 역사의 물길을 열었다. 그리고 호남은 2017년 대선 당시 호남의석을 석권한 안철수 대신 문재인을 선택했다. 그 이면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미안함과 향수가 있었다. 그만큼 호남인은 측은지심이 깊다.
하지만 호남인은 역사를 바꾸었을 뿐 척박한 남도땅을 따스한 햇살 스며드는 양지로 개척하지는 못했다. 호남의 민초들은 넋두리처럼 말한다. “문재인정부 들어 5년차에 접어든 현재 크게 달라진게 뭐가 있냐?”고. 가장 기대를 모았던 군공항이전문제는 꼬이다 못해 시‧도간 갈등만 깊어지고 ‘혁신도시시즌2’는 진척이 없어 답답하다. 광주형일자리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낮은 임금을 경쟁력으로 단순 임가공형태의 일자리가 얼마나 지속가능한 발전모델이 될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청와대와 정부 요직에 호남출신 인사를 대거 등용하고, 5‧18 특별법제정, 광주인공지능(AI)중심도시와 전남 블루이코노미 지원 등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애쓴 부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영남과 충청권에 비하면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서도 나름 해명이 있을 것이나 지역민이 체감하는 온도차는 상당히 차가운 것 만은 사실이다. 게다가 인구학적인 측면에서도 광주‧전남‧북은 급속한 고령화로 지방소멸이 가속화되고 있다. 수도권 집중화가 낳은 결과이지만 전라도에 인구를 유인할만한 생산기반이 취약한 것이 주된 원인이다.

 

남은 임기동안 격차 해소기대

 

문재인 정부가 1년남짓 남은 임기동안 이 온도차를 좁히기 위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에 발맞춰 광주시와 전남도, 그리고 지역민이 청사진을 만들어서 적극 소통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이제 우리는 2021년 다시 역사의 분수령 앞에 서있다. 다시 대지 위에 한(恨)과 신명의 에너지를 끌어올려 새날을 써야하는 촛불앞에 서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촛불은 가녀리고 미약하다. 새벽 첫닭이 울었으나 미명의 그림자는 터널처럼 깊고 길다. 그래서인지 코로나 확산억제를 위해 당국의 산행자제 당부에도 불구하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순백의 산정에서 새해 상서로운 기운을 심호흡하며 코로나로 억눌린 울화를 털어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직접 산행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눈덮인 남도의 우람한 설산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어본다. 하루 빨리 우리나라가 코로나의 악몽을 떨쳐내고 일상이 회복되기를. 그리고 내가 살아온 남도땅에 따스한 온기가 감돌기를. 또한 신축년 남도의 새벽에 묻는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