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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전방·일신방직, 역사인식과 기억의 관점에서 살펴야

전방·일신방직, 역사인식과 기억의 관점에서 살펴야


광주시 북구 임동 일대 7만평에 들어선 전방·일신방직 공장 보존 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가동을 시작한 전방·일신방직 공장은 설립 당시 지어진 화력발전소, 집진시설, 고가수조(물탱크), 저수지, 목조공장 건물 등 80년 이상 된 근대산업유산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지난해 개발을 염두에 둔 한 부동산개발업체로부터 매수가 추진되면서 해당 시설의 문화재적 가치와 개발범위를 놓고 광주시와 개발사업자간 줄다리기가 진행되고 있다. 광주시는 현재 각계가 참여한 ‘전방·일신방직 공장부지 협상대상지 선정검토 전문가 합동 기획단(TF)’을 운영해 근대 건축물인 화력발전소, 보일러실, 수조, 국기게양대 등을 보존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또한 공장 내 건축물·생산설비 등 현황조사, 자료구축, 특성 규명 등을 위한 용역이 진행 중이다. 

공장내 근대산업유산이 수두룩

전방·일신방직 공장 부지는 근대산업유산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10대 여공들의 눈물겨운 노동착취와 희생, 산업사회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광주의 역사적 원형을 가장 깊이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광주시가 추진중인 장소성 탐색을 위한 용역작업이 단순한 문화재 보존 차원에 국한해서는 안되며 역사인식과 기억의 관점에서 확립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전방·일신방직의 태동과 변천사를 심도있게 천착해볼 필요가 있다.
전방·일신방직은 일본 재벌 미쓰이 계열 가네보(종연)가 1935년 임동 100번지에 방직공장을 설립함으로써 오늘에 이른다. 가네보가 광주에 대규모 면방직공장을 설립한 배경은 인근 화순탄광으로부터 연료조달이 용이하고, 전남에 면화재배가 활발해 원료수급이 용이한데다 시골에서 올라온 풍부한 유휴인력 등 모든 생산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가네보는 광주천 하류 임동에 16만평의 부지를 확보해 이 가운데 7만평에는 공장을 짓고, 나머지 9만평에는 광주시민을 위한 공원과 위락시설을 조성해 기증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풀장과 일부 동물원만 조성하고 나머지는 중단되고 말았다. 초창기 종연방직은 방적기 3만5천추, 직기 1천440대, 직원수 3천명으로 국내 최대규모였다. 
생산직들은 대부분 나이어린 10대 여공들로 고온다습한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본인 관리자들의 엄한 감독하에 노동착취를 당해야 했다. 졸거나 실이 끊겼을 때 재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쇠꼬챙이로 눈을 찔러 얼굴에 피가 흐르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수개월간 직원자치체제로 운영되는데 이때 세워진 해방기념 국기게양대가 지금도 남아있다.
이어 미군정청이 공장을 접수해 가동에 들어가는데 이때 이북 평남출신 통역관인 김형남이 공장 관리책임자로 임명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해 북한군이 광주를 점령하자 미군은 공장이 북한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폭격을 가해 시설과 건물 대부분이 파괴된다. 
이듬해인 1951년 미군정청은 방직공장을 민간에 불하하는데 이 때 김형남과 김무성 전 국회의원의 부친인 김용주, 그리고 이한원 대한제분 창업자 등 세 사람이 인수해 1953년 2월 전남방직주식회사로 출범한다. 그후 1961년 전남방직은 기업의 대형화와 경영진의 이견으로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분리돼 70, 80년대 한국 방직산업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세계적인 관광자원으로 가꿔야

전방·일신방직공장은 비단 산업시설로써뿐 아니라 70, 80년대 광주시민의 삶을 애틋하게 껴안고 있다. 대표적인 장소가 광주천 건너 양3동 발산마을과 뽕뽕다리이다. 발산마을은 방직공장에 종사하던 수많은 여공들이 한칸짜리 방을 얻어 생활했던 곳으로 지금도 당시 벌집구조의 집들이 남아 있다. 방직공장과 발산마을을 잇는 뽕뽕다리는 구멍뚫린 철판을 엮어서 만든 임시가설교로서 여공들과 관련한 해학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밖에 광주 최초 산업선교 현장인 서림교회, 산업체 부설학교였던 전남중·고의 흔적들은 광주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하고 있다. 
전방·일신방직 공장은 이처럼 일제강점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광주 산업화의 생생한 장소이자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어린 현장이다. 이러한 역사적 아우라가 깃든 산업유산을 개발논리로 덮어버려서는 안된다. 원형을 잘 보존해서 역사적 시대상을 널리 알리고 세계적인 관광자원으로 가꾸어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해야 한다. 눈앞의 이익을 쫓다가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을 범해서는 결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