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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해남 두륜산 기행

해남 두륜산기행
(1992.07.12.)

1992년 7월 12일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창밖은 ‘비오는 날의 수채화’였다. 가랑비이기는 하지만 장마권의 영향을 받아 빗줄기가 계속될 것임은 분명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던 차에 따르릉 전화벨이 흠칫 남은 잠결을 거두어갔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길 떠나는 나그네가.
전날 회원들에게 배부한 산행계획서에 비가 오더라도 모이자고 메모를 해두었지만, 막상 비가 뿌려지니 나부터 마음이 내키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갈피를 못잡고 있는데 목포에 사는 고규석 회원이 해남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알려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 ‘갈 것이다’ 결단을 내리고 산행을 강행키로 했다. 오전 8시30분까지 터미널로 모이기로 했는데 한번 흔들린 마음을 추슬러 나오자니 시간이 지체될 수 밖에….
9시가 되어서야 7명의 회원이 최종적으로 모여 버스에 올랐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교외풍경이 상큼하게 다가온다. 두 달여 가뭄 끝에 내린 단비인지라 초목들이 더욱 싱그러워 보였다.
해남에 오전 11시에 도착한 일행은 다시금 대흥사행 버스에 올랐는데 승용차로 먼저 달려온 고규석 회원이 우리와 만나 합류하게 되었다. 대흥사 입구에 도착해 각자 준비해온 김밥을 나눠먹고 12시30분에 산행을 개시했다. 매표소에서 절 입구까지 무료 서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었지만 점심식사 시간이라 상당시간 대기할 수 밖에 없어 걸어가기로 했다. 절까지 20분 정도 걸리는 진입로는 녹음이 우거져 아늑한 분위기와 함께 은은한 산내음을 선사했다.
대흥사 절에 도착해 잠시 법당을 구경하고 탑과 뒤편 봉우리를 배경으로 ‘찰칵’ 기념사진 한 컷에 모두의 얼굴을 담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산길을 오른다. 북암코스를 막 접어드는데 스무살 가량의 아가씨가 일행을 놓쳤다며 함께 가자고 다가와 박수로 환영했다. 북암코스 정상까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가파른 능선이 계속돼 두 번이나 쉬어야 했다. 봉우리 암자에서 20분간 휴식. 절이 들어선 지 오래됐는지 곳곳에 커다란 맷돌이며 기와조각이 세월의 잔해처럼 남아 있었다. 구름다리 코스를 가면서도 탑만 우뚝 서 있는 절터가 있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원형을 잃고 편린만 남아 역사의 뒤안으로 묻혀짐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랴. 이 또한 인연이라지만 번뇌많은 인간의 마음 속은 애잔함이 번진다. 
산굽이를 따라 30분 정도 걸으니 무등산 중봉처럼 제방 양 옆에 암봉이 기대서 있는 듯한 곳이 나왔다. 정면에는 평야가 시원스레 펼쳐있고 양측면에는 서석대같은 바위기둥이 장쾌한 산울림을 자아내고 있다. 해남 쪽에는 옅은 비구름만 오갈 뿐 비다운 비는 내리지 않고 연기같은 비안개가 사면을 에웠다 갰다를 반복하며 조화를 부린다.
우측 암봉을 지나 하산하게 되는데 바로 이 정상에 바위가 얹혀 다리를 이루고 있는 구름다리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혼자 오르기 힘든 절벽이 가로막고 있어 누군가가 손을 잡아줘야 한다. 김재철 기획간사가 한 사람씩 위로 잡아당겨주는데 정미란 회원이 발아래 아찔한 낭떨어지를 보고는 그만 비명반 울음반으로 무서움에 떨어 주변사람까지 스릴을 느끼게 했다. 
산 정상에 올라보니 동서남북이 납작 엎디어 있다. 장부의 위엄으로 한껏 호령을 부리고 싶은데 비안개가 오히려 사방을 가렸다 열었다 위세를 부린다. 우리 일행은 남은 음식과 술로 출출함을 달래고 나서 진불암쪽으로 하산을 서둘렀다.
두륜산의 매력은 울창한 산림과 오래된 암자가 여럿 있다는 점일 것이다. 수종은 남해안 인근 지역이라 동백을 비롯 내륙지방에서 보기드문 나무가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어 색다른 느낌을 더해준다. 산비탈을 내려오면서 ‘자연보호’ 리본을 몇 개 달았지만 다른 산에 비해 요란스럽게 걸려있지는 않았다. 숲 터널을 한참 내려오니 진불암이 지친 우리 일행을 반겨맞는다. 흠뻑 젖은 땀과 열기를 씻어내고 스님들만 은밀히 마시는 약수로 갈증을 달래본다.
40분 가량 평지를 걸어 절 입구에 도착해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데 일행에 끼어든 예의 아가씨가 고마움의 표시로 캔음료를 선물한다. 무안 일로읍사무소에 근무한다고 자신을 소개한 아가씨는 일행을 놓쳤다고 얘기했지만 차림새로 보아 산행을 예정하고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데…’. 가파른 산길을 숨차게 오르며 그녀는 무엇을 다짐했을까? 비안개처럼 그녀 또한 머릿속에서 조화를 부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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