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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버지를 회상하며

 

 

 

아버지를 회상하며

-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원고

 

나의 아버지는 20146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34월에 태어나 젊은 시절을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 등 한국사회 격변기의 한복판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배움이 적지 않았으나 일찍이 폐병을 앓게 되어 평생을 한량(閑良)’으로 사셨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는 곧잘 집을 비우셨습니다. 과수원 양철지붕이 태양에 이글거릴 때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 아득히 걸친 읍내 신작로에는 아버지가 탄 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가끔 장날이면 도회지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리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중절모에 코트 깃을 세운 신사 차림으로 신작로를 터벅터벅 걸어오셨습니다. 과수원에는 어린 복숭아 열매가 열병을 앓고 풍뎅이들이 윙윙대는 한낮, 다알리아 꽃이 여름의 문 앞에 드리울 때 아버지의 방에선 향수냄새가 났습니다.

과수원을 떠나 어느 도시의 빈민촌 방 한칸을 얻어 이사했을 때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방을 마련하셨습니다. 가끔씩 방과 방 사이를 오가며 우리들의 훌쩍 커버린 모습에 놀라셨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비로소 나도 가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내가 중년이 되어 가장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여념이 없을 때 아버지가 수척해진 얼굴로 찾아오셨습니다. 당장 보호의 손길이 필요한 상황이어서 요양병원에 입원시켜 드리고 틈틈이 문안을 드렸습니다.

요양병원은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일상 한켠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고요한 섬과 같았습니다. 창 너머엔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지만, 병실에는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관조와 무언의 쓸쓸함이 가득해 묘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바쁜 나날 속에서 병원을 찾는 것이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생의 끝자락에 홀로 남겨진 늙고 야윈 아버지를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사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가급적 남은 재산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지출을 관리하느라 간혹 언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풀기도 하면서 측은지심이 깊어졌습니다. 젊은 시절 내가 외면하곤 했던 아버지의 눈빛을 마주하면서 어느 순간 부자(父子)간의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눈빛은 온화하고 다정하게 와닿았습니다.

돌이켜 보니 아버지는 참으로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내가 고학으로 어렵게 대학에 진학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이며, 직장에서 중책을 맡았을 때, 그리고 시집을 낼 때마다 누구보다도 기뻐하시고 주변 지인들에게 자랑하셨습니다. 또한 늘 지갑에 나의 얼굴 사진을 넣고서 품에 지니고 계셨습니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던 어느 날, 아버지가 병실로 나를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힘없는 목소리로 토막토막 이 젠, 집 으 로, 가 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뒤돌아 서서 어둠이 내리는 줄 까마득히 모른 채 계단을 내려와 불빛이 뒤덮은 거리를 지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는데 아버지는 병실에서 비밀리에 생의 끝자락을 접고 계셨습니다. 멀리서 아련히 사원의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뉴월 아미타불의 정원에 연꽃이 막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신전 속으로 조심스레 몸을 누이셨습니다.

나는 간혹 병실 복도를 걷는 꿈을 꿉니다. 자신의 삶을 회상하던 마지막 그 얼굴, 잔상처럼 내 마음에 머물러 있는데, 큰 산 그림자 넘을 수 없어 그리고 울 수도 없어 나는 오늘도 아버지의 빈 방에서 우두커니 그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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