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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5)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5)

 

나는 외국에 나가면 한 번쯤 서점에 들르곤 한다. 호텔 방에서 나홀로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데는 책만한 게 없다. 그래서 현지에서 영어로 쓰인 책을 구입해서 읽는 게 취미가 되었다.

그녀를 따라 세느강변에 있는 세익스피어서점에 갔다. 그녀는 이 책방은 시내에 나오면 간혹 들르는 곳인데 그렇게 크지 않지만 나름 유명한 서점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아마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것 같았다.

나는 서가에 꽂힌 책들 가운데 영어로 쓰인 책들만 골라서 훑어보았다. 그리고 주로 소설 등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녀는 다른 코너에서 미술과 관련한 전공분야 서적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미국 작가의 소설 한 권을 골랐다. 그녀는 내가 카운터에서 책값을 지불하는 것을 보고 읽던 책을 서가에 꽂아놓고 나를 따라나설 채비를 했다. 우리는 책방을 나와서 마로니아 가로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녀가 기분이 좋았는지 연인처럼 나의 팔짱을 꼈다. 한국에서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을 그녀는 자연스럽게 했다. 파리의 자유분방한 문화에 익숙한 탓으로 생각되었으나 나 역시 싫지 않았다.

나는 그 때의 느낌이 좋아서 귀국해서 시 한편을 썼다.

 

-세익스피어 서점에 편지를 부치다-

파리 세느강변 세익스피어 서점에 편지를 부쳐야겠다

12시에 문을 여는 이유를 묻고자

선술집도 아닐터인데 늦게야 문을 여는 이유가 뭐냐고

오전 내내 유람선을 타다가 다시 오라는 것인지

주인 대신 낡은 유리창문 너머 책표지들이 마른 기침 소리를 낸다

세익스피어 서점에서 책을 사서 읽으면

활자들이 머리에 콕 박혀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에 세익스피어 서점에서 산 책을 선물하면

사랑에 빠질 것 같다

그러나 발신 주소는 쓰지 않겠다

답장이 오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다시 그곳에 들러 꼭 책을 사고 싶기 때문에

다만 문을 여는 시간을 앞당기라고 주문할 것이다

그런데 몇 시에 문을 열라고 할까

오전 8.......9.......10......

시간 개념이 혼란스럽다

어쩌면 낮 12시를 고집할지 모르겠다

단골만을 상대하는 책방이니까

그보단 유명한 서점이니까 배짱을 부릴까?

세익스피어 서점에 편지를 부치고 돌아서니

벌써 12시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