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아온 날의 풍경

이방인에 대하여

이방인에 대하여
‘Stranger in the village’(by James Baldwin)를 읽고

이방인에 대하여

 

James Baldwin(1924~1987)처럼 나도 태생적인 이방인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난으로부터 기인한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 후 가정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수년간 공장에 다닌 적이 있다. 요즘은 돈이 없어도 누구나 대학교까지 가는 시대이지만 1970년대 당시는 수업료 부담 때문에 가난하면 중학교도 가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 후 가구공장에 다닌 적이 있는데 나같은 공돌이(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다니는 청소년을 비하하는 표현)들은 동네사람들로부터나 사회적으로 냉대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나를 멀리 하였고 등하교때 동네에서 마주쳐도 눈길도 주지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자신의 아이들이 나와 함께 노는 것도 꺼려했다.
공장에서 쉬는 날은 한달에 겨우 두 번(둘째, 넷째주 일요일)밖에 되지 않는다. 어느 쉬는날 공장친구들과 함께 지금은 없어진 현대극장에 영화를 보러갔다. 요금은 조조, 성인과 학생 3가지로 구분돼 있었고 학생요금은 성인의 절반이어서 망설이다가 학생표를 끊어서 들어갔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직원(통상 ‘기도’라고 하는데 대부분 조폭스타일이다)이 표를 보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네가 어떻게 학생이냐, 성인표를 사오라”고 윽박질러 결국 성인표를 사가지고 영화를 보았다.  
당시는 사회 모든 공공 및 민간서비스 분야가 학생들에게는 할인혜택이 있었으나 나같은 공돌이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이방인 아닌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시대였다.
산업화로 인한 경제성장으로 사회계급이 분화되는 시점에 산업의 역군이면서도 오히려 천대받는 사회인식이 그 당시의 실제 모습이고 모순적 현상이었다. 1950년대 미국처럼 미국건설의 희생양이었던 흑인들이 부유한 미국사회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듯이 말이다.
그 후로 나는 공부에 한이 맺혀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1987년 전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해 현재까지 28년째 근무하고 있다. 또한 전남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해 전남대와 광주대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영어공부도 자기개발 욕구와 아울러 못배운자의 피해의식의 연장선에서 실천되고 있다. 이방인은 소외의 아픔을 결코 지울 수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를 미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그 당시 경제적 역경을 좀더 발전된 삶을 살 수 있는 에너지로 전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릴적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로 나를 위안해본다.         

'살아온 날의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학사와 배  (0) 2015.04.12
무등산 장원봉에서 맞은 새해  (0) 2015.01.01
골목길 청포도 넝쿨이 정겹다  (0) 2014.06.15
review-아듀 2009  (0) 2014.06.15
매실을 따며  (0) 2014.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