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호남유산 천년의 숨결

나주역사는 전라도의 역사

나주역사는 전라도의 역사

고려 개국에 협력 900년간 목사고을
단발령에 맞서자 1896년 관찰부 폐지

 

나주는 약 900년간 전라남도의 수도였다. 1018년(고려 현종 9년) 전국 8목의 하나로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쳐 전라도라 칭할 때 나주는 전남을 관할하는 행정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로 말미암아 나주는 천년에 이르는 두터운 역사의 지층을 품고 있다. 그리고 전라도의 숨결과 문화를 잉태하는 발원지로서 독보적인 위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나주는 역사의 땅으로 불린다.
영산강 유역에 자리한 나주는 선사시대 이래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어 고대문화를 꽃피웠다. 구석기~철기까지 시대별 유적이 고르게 발견되었으며, 특히 철기시대 옹관고분군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고분양식으로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뿐만아니라 나주는 고려 왕실과 오랜 기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후삼국 당시 나주는 견훤이 아닌 왕건과의 연대를 선택해 고려 건국에 힘을 실어줬다. 이후에도 나주출신 장화왕후에게서 혜종이 탄생해 어향으로 불리웠으며 거란 침입시에는 고려왕실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나주는 전남의 변함없는 중심지였다. 나주읍성은 1237년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나주목사로 부임한 인물은 모두 42명이었다. 또한 사족간의 대결인 기축옥사, 을미옥사에 휘말리는가 하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들이 큰 활약을 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나주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서게 됐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진압한 공로로 위상이 오르지만, 뒤이어 단행된 단발령을 계기로 운명이 바뀌게 된다. 1896년 나주 유생들이 단발령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참서관 안종수를 처단하였다. 그해 6월 조정은 관제를 개정하면서 나주 관찰부를 폐지하고 이를 광주로 옮겼던 것이다./박준수기자 jspark@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