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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시장의 추억(수정) 비아시장의 추억(수정) 비아시장은 비아초등학교와 더불어 내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숨쉬고 있는 장소이다. 장소와 공간은 어떻게 다른가. 공간이 추상적인 개념이라면 장소는 인간의 활동이 축적된 구체적 개념이다. 예를 들면 ‘가상공간’이라고 하지 ‘가상장소’라고는 하지 않는다. 비아시장은 비아초등학교 입구에 자리하고 있어 장날이면 왁자지껄한 장의 풍경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비아장과 비아초교는 예전에는 야산 언덕이었다. 비아장이 개장한 시기는 조선말쯤으로 보인다. 이후 일제강점기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구전에 의하면 장성 황룡 신거무장이 옮겨왔다는 설이 있다. 장이 서면 장옥은 물론 주변 도로에까지 상인들이 난장을 펼친다. 장날에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들이 있다. 첫 번째가 대장간..
비아시장의 추억 비아시장의 추억 비아시장은 비아초등학교와 더불어 내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숨쉬고 있는 장소이다. 장소와 공간은 어떻게 다른가. 공간이 추상적인 개념이라면 장소는 인간의 활동이 퇴적된 구체적 개념이다. 예를 들면 ‘가상공간’이라고 하지 ‘가상장소’라고는 하지 않는다. 비아시장은 비아초등학교 입구에 자리하고 있어 장날이면 왁자지껄한 장의 풍경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장이 서면 장옥은 물론 주변 도로에까지 상인들이 난장을 펼친다. 장날에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들이 있다. 첫 번째가 대장간이다. 비아장 부근에 대장간이 있었다. 장날이면 대장간에서 아저씨와 아줌마, 젊은 총각이 셋이서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줌마는 풀무를 밀고 아저씨는 쇠를 달구고 총각은 쇠망치로 두드렸다. 대장간의 볼거리는 풀무가 당겨..
식어버린 붕어빵 식어버린 붕어빵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로 기억된다. 엄마를 따라 버스를 타고 광주시내에 사는 외가 누님을 만나러 갔었다. 결혼을 한 누님은 광주에서 방 한칸을 얻어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외갓집은 화순 이양인데 출가를 해서 도시로 나온 것이다. 누나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엄마를 따라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정거장에 갔다. 비아행 버스가 도착해서 엄마와 나, 그리고 누님이 탔다. 차안에는 승객들이 많았고 나는 누나옆에 서 있었다. 차장의 오~라이 소리와 함께 차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했다. 5분여를 가는데 옆이 허전했다. 두리번 거리며 살펴보니 누나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 출발 직전에 나만 남겨두고 슬며시 내려버린 것이다. 순간 울음이 솟구쳤으나 꾹 참았다. 엄마가 원망스..
과수원 떠나던 날 과수원 떠나던 날 감나무는 통상 해걸이를 한다. 한해 흉작이면 그 다음해는 풍작이다. 감나무 스스로가 체력에 맞게 조절을 하는 모양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69년 가을 과수원의 감나무들이 대풍작을 이루었다. 나무마다 황금빛으로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부모님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수확철이 가까워지면 광주시내 상인이 찾아와 밭떼기와 마찬가지로 감나무 전체를 놓고 흥정을 한다. 그리고 계약이 성사되면 대금을 지불하고 수확에서 상차까지 모든 작업을 상인이 맡아서 처리한다. 그 해 우리집도 상인과 통거래를 하였다. 마당 근처 몇그루를 제외하곤 모두 상인에게 넘겼다. 인부 여러 명이 작업을 해서 나무괴짝에 담아 12톤 트럭 가득 싣고 갔다. 그때 기억으로 30만원을 받은 것 같다. 내..
사라진 과수원 사라진 과수원 1993년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토지공사(현 LH공사)로부터 비아 과수원안에 있는 묘지를 이장해가라는 통지가 왔다는 것이다. 광산 비아와 북구 삼소동 일대가 첨단단지로 지정돼 토지공사에 의해 본격적인 사업 착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미 보상작업이 마무리되고 이주가 이뤄진 상태에서 마지막 묘지이장이 진행되는 시점이었다. 나는 주말을 이용해 이장작업을 하자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약속한 날에 내가 살던 양3동 발산마을 아파트를 나서서 승용차로 비아과수원에 도착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먼저 오셔서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과수원 현장은 이미 지장물 철거작업이 거의 마쳐진 상태로 허허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탱자울타리도, 양철집도, 과일나무도 내가 뱀을 보고 줄행랑을 쳤던 연못도..
과수원 밖 풍경 과수원 밖 풍경 과수원 밖 풍경은 어떠할까. 우리집은 응암과 미산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했다. 탱자울타리 밑으로는 손바닥만한 논이 있었다. 집앞 신작로는 오솔길처럼 좁아서 소달구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집앞 길옆으로 무덤이 3기가 있어서 간혹 올라가서 놀았다. 그러면 무덤 주인집 아들이 발견하고는 주의를 주곤했다. 그는 나와 같은반 친구였다. 집 툇마루에서 바라보면 이 모든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더 멀게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아읍내와 광주를 오가는 버스들이 보였다. 동네에서 비아읍내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수시로 사람과 수레바퀴의 움직임이 들려왔다. 내가 기억하는 거리의 풍경은 여느 시골과 크게 다르지 않다. 등에 화장품 쇼케이스를 짊어지고 동, 동 북을 치는 동동구루무 장수, 자..
인생은 동백꽃이더라 인생은 동백꽃이더라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지 마라 인생에 뒤안은 없다 운명 앞에 우쭐거리지 마라 화려함도, 슬픔도 눈덮이면 한갓 무심한 백사장인 걸 눈길 녹으면 진창길이다 인생은 동백꽃이더라 봄 기다리는 언덕에 서둘러 낙화하는 한점 붉은 노을이더라 인생은 동백꽃이더라 나 홀로 외로움에 지쳐 아무 말 못하고 그림자 하나 남기는 외진 계절의 마침표이더라.
과일수확 과일수확 우리집 과수원에서 과일 수확은 여름과 가을 두 차례 이뤄진다. 여름에는 복숭아, 가을에는 감을 딴다. 그러나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라 솎아낸 어린 열매도 훌륭한 먹거리가 된다. 단지항아리에 물을 부어 어린 열매를 며칠 담궈놓으면 떫은 맛이 없어져 먹을만하다. 이렇게 하는 것을 ‘우려낸다’고 한다. 이 무렵 우리집에는 종종 동네 아이들이 찾아와 솎아낸 열매를 주워가곤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목에 힘을 주며 인기를 누릴 수 있는 시기이다. 복숭아는 때깔이 고와야 상품가치가 높다. 그리고 풍뎅이들이 복숭아를 좋아하기 때문에 어린 열매를 솎은 후 쓸만한 것을 골라 봉지로 싸주어야 한다. 봉지 싸는 일은 동네 아가씨와 아줌마들 몫이었다. 이들은 핀이 담긴 깡통을 허리에 차고 열매마다 일일이 봉투를 씌워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