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느강물처럼 도도한 예술적 역동성 '꿈틀'
퐁피두센터 현대전 '색채에 깃든 동양적 사유' 강렬
파리시청 미술관 아침부터 오후까지 관람객 장사진
구도심 마레지구엔 포장지를 뜯고 나온 신작들 즐비
미술관마다 가족단위 관람객들 많아…'예술사랑' 인상적
세계는 지금 '문화전쟁'의 시대라 할 만큼 문화자원 개발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는 국제화의 물결속에서 각국이 문화를 매개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폭을 넓혀가는 새로운 코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문화수도'를 지향하는 광주는 올해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이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가는 등 인프라구축이 가시화돼 한국문화의 발신기지로서 새 장을 펼칠 예정이다.
본지는 유럽의 관문이자 세계 문화중심지로서 확고한 위상을 얻고 있는 프랑스 파리를 찾아 문화현장의 역동성과 시민들의 문화애호 정신을 조명함으로써 '문화수도 광주'의 나아갈 방향을 그려본다. <편집자주>
필자가 파리동역(Gare de l'Est)에서 내려 마주한 파리의 시가지 풍경은 초겨울의 실루엣이 짙게 깔린 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지하철 연결통로 중 한곳이 공사중이서 매표창구는 매우 혼잡한 가운데 흑인남자와 아랍계 남자가 자신의 전철표를 사달라며 손을 내민다. 보통 10매 묶음으로 할인된 가격에 사는 게 일반적인데 오늘처럼 줄이 길게 늘어서는 날은 빨리 타기위해 다소 비싸지만 낱장표를 사는 사람이 있어 매매차익을 얻는 기회가 된다.
개통된 지 100년이 넘은 파리의 지하철은 그 세월만큼이나 내부가 낡은데다 좁은 갱도와 희미한 불빛 때문에 우중충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벽에 붙은 화장품이나 패션 또는 문화행사를 알리는 포스터는 세련되고 화려해 극한 대조를 이룬다. 파리의 지하철은 러시아워 땐 서울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지옥철'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파리시내를 걷다보면 종종 벽면에 '그라피티(graffiti)'라는 디자인된 글씨들을 목격할 수 있다.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에도 이런 작품이 선보여 화제가 된 바 있는데 대부분 암호처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으나 '저항의 외침'이 많다고 한다. 프랑스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자신들의 억눌린 심경을 이렇게 표출하기도 하고 마약을 거래하는 은어로 활용되기도 한다.
유럽 문화와 패션 1번지 파리는 남성적인 이미지보다는 여성적인 이미지가 더 강렬하다. 길거리 여기저기에 널린 쓰레기와 개똥이 흉물스럽기는 하지만 문화에 대한 그들의 자존심과 애착은 예술의 도시 파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뒷받침하고 있다.
필자는 파리에 3일간 머물면서 퐁피두센터와 빨레드 토쿄(Palais de Tokyo), 쁘띠 빨레(Petit Palais), 마레지구의 갤러리등 미술관 순례에 나섰다. 필자가 모두 3차례 파리를 방문했지만 루브르 박물관을 제외하곤 현대미술을 차분하게 관람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리시청역에서 내려 퐁피두센터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피다 시청건물 주위에 아침부터 길게 늘어선 행렬을 보았다. 처음엔 민원업무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로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시청구내 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관람하려는 인파였다. 청사벽면에 걸린 전시 프랑카드만 보면 이곳이 미술관으로 착각할 정도로 하루 종일 장사진은 계속됐다. 꺄뷰와 파리라는 이름의 전시는 쟝 꺄뷰라는 만화가가 그린 파리도시와 파리지엥의 일상을 두고 그린 크로키전이었다. 그는 세느강을 거닐때 늘 크로키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파리지엥의 독특한 패션, 습관, 삶의 모습등을 포착해 익살스러우면서도 아름답게 그려왔다. 그는 정치인들의 캐리커쳐와 르포현장에서 크로키한 뉴스들을 피가로, 샤흘리 엡도 등의 신문에 연재하고 있으며 파리시청에서 처음으로 전시한 만화가라고 한다. 9번째 예술이라 불리우는 벙드데씨네(만화)에 대한 파리사람들의 애착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시청에서 도보로 채 10분도 안된 거리에 퐁피두센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기존의 컬렉션 작품들을 전시하는 상설전과 별도로, 한 시즌에 4개의 특별전을 기획하는 퐁피두센터에서 표를 사기위해 1시간가량 기다리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닌듯 싶었다. 관람객 대부분은 파리시민들로 가족단위로 구경오는 경우가 많고 외국관광객은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건물내의 무선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찾은 젊은이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퐁피두 센터의 관람 동선은 맨 위층인 6층에서 시작돼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구조로 돼있다. 6층에서는 IKB (International Klein Blue) 라는 색의 창시자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 이브클랭의 전시가 한창이었다. 지중해의 깊은 수심에서 나오는 듯한 독특한 푸른색을 만들어 창안해 그 색을 이용한 모노크롬(단색화)시리즈와 인체를 하나의 붓으로 사용해 그려낸 것이다. 그림들은 규칙에서 벗어나 색의 존재만으로도 화폭을 채울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무형의 아름다움을 갖는다라는 작가의 메세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전시의 기획적인 면에서 보자면,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전시장의 군데군데에 설치해놓은 미디어 설치물들이 인상적이었다.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작품 옆에는 그때 당시를 다큐멘터리화한 기록영화를 상영하고 있었으며, 전시장 중간에 설치된 편안한 소파 옆에는 스피커 박스를 설치해 음성자료들을 들을 수 있게 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어린이들의 관람에 포인트를 맞춰서 어린이를 위한 전시 동선을 바닥에 그려놓았으며, 어린이의 사고에 맞는 쉽고 재미있는 설명을 중간중간에 비치해 놓았다. 특히 이브클랭 미망인의 인터뷰와 그들의 결혼을 황제의 결혼식으로 명명해 퍼포먼스화한 해프닝을 기록 사진과 함께 보여주는 비디오 앞에서 관객들은 매우 즐거워 했다.
빨레드 토쿄 (Palais de Tokyo)는 에펠탑 바로 건너편 국립현대미술관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파리에 토쿄라는 일본수도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 미술관 옆 세느강줄기에 토쿄부두가 있어 얻게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은 신예작가들의 실험적 설치미술이 주로 전시된다. 올해 가을부터 스위스국적의 전시관장이 취임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그 시작으로 50억년 (5 milliards d'annees)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조명과 비디오및 설치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모던하고 차가운 현대조형물안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용해 우연한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관람객들은 각 설치작품들을 지나가면서 우연히 소리를 듣기도 하고, 기계의 움직임을 느낄 수도 있는데, 이것은 작품의 주제처럼 50억년에 한번 찾아오는 인연으로 찾아지는 기회일 수도 있는 것이다. 파리의 초현대 미술관에서 윤회와 인연을 말하는 동양철학의 향기를 느낄수 있었다.
쁘띠빨레(Petit Palais)는 옛 궁전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으로 말 그대로 작은 궁전이다. 건너편 그랑빨레(Grand Palais)가 현대미술이 전시되는 반면 이곳은 궁궐의 소장품과 근대미술 작품이 나란히 전시돼 18~19세기 유럽의 문화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특히, 세잔느, 시슬리, 고흐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원작으로 만날 수 있어 이들이 주는 빛의 감동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마레지구는 구 도심이자 파리시청 건너편 국립문서보관소가 있는 골목길로 광주로 치자면 궁동 '예술의거리' 같은 곳이다. 현대 유명작가들의 스튜디오와 전시장이 밀집해 있어 세계 미술의 1번지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작가들의 최신작이 막 포장지를 뜯고 전시되는 곳이어서 가장 먼저 파리 현대예술의 역동성을 온몸으로 호흡할 수 있다.
필자는 파리에서 세명의 한국 유학생과 남부출신 프랑스 청년을 만났다. 전공이 대부분 문화관련 분야여서 자연스레 화제는 한국과 프랑스 문화에 대해 모아졌다.
파리1대학에서 조형예술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임인영씨는 광주비엔날레가 대중과의 눈높이에 비중을 두면서 예술성으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을 갖는다면서 상하이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의 맹렬한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보다 명확한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필자는 파리를 떠나기에 앞서 사흘간 느낀 여정의 편린들을 다음과 같이 짤막한 시편으로 형상화해보았다.
'마레지구 노천카페에서'
파리 한복판 마레지구 골목길 / 노천카페에서 마시는 커피잔 속에 / 파리의 가을이 프리마처럼 번져간다 / 갈색커피의 유혹에 감겨드는 프리마의 하얀 살결 / 커피향보다 진한 샤넬 향수가 코끝에 스멀거린다 / 수많은 인종들의 인파속에 뒤섞인 언어들이 / 저마다의 철자법으로 매듭지어진다 / 한 모금 가을이 노을처럼 몸안에 고독으로 내려앉는다 / 아듀(Adieu), /떠남의 시간은 스쳐지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처럼 잠시 귓전에 울리나 오래도록 추억으로 붙박힌다 / 가을날 사랑은 이토록 짧게 저물고 / 마로니에 낙엽지는 파리 동역에서 막차가 떠난다 / 세느강을 흘러가는 추억들이여, 가을의 방황이여.
/프랑스 파리^박준수기자 pencut@kjdaily.com /취재협조^양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