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청담직필

경전선 타고 벌교 여행하기

경전선 타고 벌교 여행하기 
2018. 05.07. 18:16

 

 

 

나이가 들면서 불현듯 옛 것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드는데 그 중 하나가 열차여행이다. 간혹 서울에 갈 때면 KTX를 이용하기 때문에 열차여행이 드문 편은 아니지만 지금의 고속열차와 유년시절에 타본 완행열차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마치 같은 영화라도 TV에서 보는 것과 영화관에서 보는 필(feel)이 다르듯이 말이다.



추억속의 경전선 완행열차



지난 주말 경전선 열차를 타고 벌교를 다녀왔다. 경전선은 드물게 1930년대에 건설된 모습 그대로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유년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인화시켜 볼 수 있다. 필자가 경전선 열차를 처음 타본 것은 1970년대 초이다. 외갓집이 화순 이양면 도림이어서 방학 때면 광주역이나 남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전선을 달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경전선은 광주 송정역-삼량진 구간으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철길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명칭이다. 그러나 두 지역간 인적, 물적 교류가 많지 않고 도로의 발달로 이용객이 줄면서 경전선 열차운행이 한 때 중단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지역민의 반대여론으로 열차는 계속 운행되고 있지만 하루 4회 3량의 객차를 달고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다.

최근 뉴스에서 경전선 전철화가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난주 연휴를 틈타 가족과 함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로 잘 알려진 벌교를 여행지로 택했다. 당일 아침 기차표 예매를 위해 코레일 사이트에 접속해서 보니 연휴기간이어서인지 좌석이 몇 개 남지 않았다. 미리 도착해 효천역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몇 명의 승객이 매표소에서 표를 끊는데 좌석이 매진돼 입석표를 구입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열차에 오르니 좌석마다 이미 승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타고 있었는데 젊은 대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열차는 곧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했고 차창 밖으로 5월의 신록이 펼쳐졌다. 열차는 산과 들판과 강을 따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옛 추억의 철로를 힘차게 질주했다. 나무들은 차창 가까이 다가와 푸른 잎들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경전선은 산길을 따라 건설되어 마치 숲속을 달리듯 상쾌하고 낭만적인 느낌을 준다. 간혹 철로에 의해 감춰진 내밀한 공간이 ‘비밀정원’처럼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손바닥만한 자투리 논밭이 누군가의 손길로 가꿔진 흔적과 앙증맞은 방죽, 외딴집 등이 동화속 풍경처럼 호기심을 자아낸다. 한참동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옛 외갓집이 있던 도림역은 오래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건널목 신호등만 깜박거릴 뿐이었다.



근대 벌교의 내밀한 이야기



1시간 30분을 달려 벌교에 도착하니 소도시다운 한적한 분위기 속에 지방선거 후보자들이 내건 현수막이 뜨거운 선거열기를 말해주었다. 역부근 식당에서 꼬막정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본격적인 읍내 관광에 나섰다. 맨 처음 찾은 곳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문학관이었다. 분단현실을 작가의 역사인식과 치밀한 현장취재를 통해 10권의 대하소설로 집대성한 ‘태백산맥’을 기리는 문학관이다. 4년간의 취재와 6년간의 집필과정을 통해 탄생한 태백산맥은 1천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할 정도로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대작이다. 최근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 또한 새로워지는 것 같았다. 문학관을 나와 소화의집과 현부자집을 살펴보고 부용교를 건너 시내에 있는 보성여관에 들렀다. 일본식 여관인 이 건물은 오랫동안 상점으로 이용되다가 문화재청이 구입해 새롭게 보수해 지금은 문화재로 탈바꿈해 관광객을 맞고 있다. 전시실과 공연장, 카페는 물론 다다미방에서 숙박까지 가능해 복합문화공간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점이 돋보였다. 이곳에서 차 한잔을 마시고 전시실을 둘러보며 벌교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어 인근에 있는 일제강점기 금융조합 건물에 들러 근대 벌교의 경제적 현황을 살펴보았다.

벌교는 일제에 의해 개발된 포구이다. 여수·순천과 목포를 잇는 지리적 거점이어서 경제적 이용가치가 컸던 탓이다. 남해안에서 생산되는 쌀과 수산물을 이곳에 집하시켜 배로 일본으로 가져갔던 아픈 역사가 서려있다. 일제강점기 그늘진 역사 속에 잉태된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지금은 보성여관과 금융조합 건물만이 남아 우리에게 역사의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다.

경전선 전철화로 벌교뿐 아니라 남도의 구석구석 숨겨진 역사와 매력을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