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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직필

가을 부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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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부조(浮彫) 앞에서
박준수의 청담직필

  • 입력날짜 : 2019. 11.04. 17:34
조락(凋落)의 계절이란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가로수 나뭇잎이 길 위에 나뒹굴고 가지에 매달린 이파리는 단풍으로 물들고 있다. 이맘때 신문사 부근 광주공원은 가을의 정취가 절정에 이른다. 오후 한가한 시간에 공원 언덕에 오르면 고즈넉한 가을풍경을 만날 수 있다.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서오층탑 주변이 내가 즐겨 찾는 사색의 공간이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고요한 호수처럼 투명한 공기가 나뭇잎의 파동으로 잔물결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광주공원은 원래 성거사가 있던 절터이다. 산의 모양이 마치 거북이가 광주천 물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이어서 이를 붙들기 위해 절을 지었으며, 거북이 목 부위에 탑을 세웠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1961년 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할 때 2층 몸돌에서 사리공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이 탑의 연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치열했던 폭풍의 시간들



서오층탑 주위는 제법 고상한 이름을 가진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저마다 달고 있는 이름표를 보니 느릅나무, 단풍나무, 벽오동, 은행나무, 왕벚나무, 검팽나무 등 수종이 다양해 마치 수목원에 온듯하다. 지난 여름 무성했던 청록색 잎들이 뜨거운 햇살을 받아 울긋불긋 변색되면서 달콤한 향기를 뿜어낸다.

이 평화로운 공원에도 한 때는 치열했던 폭풍의 시간들이 있었다. 어느 해 여름 위력적인 태풍으로 아름드리 소나무와 히말라야시다 나무가 뿌리 채 뽑혀 쓰러진 적이 있다. 수 십년간 공원을 묵묵히 지켜온 거목들이 한순간 광풍에 무너져 내린 모습을 보면서 허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광주공원 나무들뿐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도 조락(凋落)이 찾아온다. 며칠전 GIST(광주과학기술원)에 들렀다가 초대 원장이셨던 하두봉 박사님이 지난 봄에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만 88세로 고령이라지만 필자에게는 느낌이 남달랐다. 하 원장님은 경남 마산 출신이시면서도 광주를 고향처럼 생각하며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1993년 초대 광주과학기술원장으로 부임해 허허벌판에 장화를 신고 흙바람을 맞으며 캠퍼스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개원 초창기 세계적인 일류 공과대학을 만들기 위해 해외 우수교수를 초빙하고 우수한 학생유치를 위해 불철주야 발로 뛰셨다. 하 원장님의 이같은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 GIST가 세계속의 대학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됐다.

화순 전남대병원 영상의학과 벽면에는 고 서정진 교수의 부조(浮彫)가 걸려 있다. 설명문에는 ‘화순전남대학교병원 개원과 영상의학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하시고 항상 나보다 너와 우리를 위한 길을 가신 서정진 교수님을 기리며’라는 추모의 글이 써 있다.



그리운 이름을 호명하며



서 교수는 2005년 11월 화순병원 팀장급 이상 리더스 워크숍 연수 일환으로 금강산을 산행하던 중 상팔담 근처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서 교수는 개원과 함께 기획담당과 특수진료실장, 그리고 영상의학과장 등 1인 3역의 직책을 맡아 개원 초기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밤낮없이 뛰어 다녔다. 격무에 지친 몸을 이끌고 기획담당으로서 금강산 연수단을 인솔하느라 과로가 겹쳐 결국 심장에 무리가 갔던 것이다.

영상의학과 직원들은 “서 교수의 특유의 부지런함과 소신에 찬 추진력, 그리고 도전정신은 쉬운 길만 찾는 우리들에게 무거운 채찍질이 되었고, 또한 어떠한 비판과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당당한 자세로 일을 추진하면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회상했다.

오늘날 화순병원이 암 전문병원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고 서정진 교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분투노력으로 이루어진 결실이다.

가까이에는 최근 우리 신문사에서 편집부기자로 일하던 김정민 부국장이 근무중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 항상 웃는 얼굴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하던 고 김정민 부국장의 얼굴이 때때로 눈앞에 어른거린다.

한 평생을 신문사에 헌신하다가 50대 중반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그의 영전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조락의 계절, 나뭇잎이 떨어져 이듬해 봄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이 그분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광주공원에 올라 서오층탑을 바라면서 이 가을 그리운 이름들을 나직이 호명해본다./본사 부사장


본사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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