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호남유산 천년의 숨결

비아 역사산책 (1)취병 조형 유허비

비아 역사산책 (1)취병 조형 유허비

 

비아 도촌 출신, 조선 현종대 공조판서 지내

일본 기행문 '부상일기' 한일외교사 귀중자료 

 

문화재발굴단이 1973년 5월 비아로 62번길 현 중흥아파트 부지(옛 광일농장) 밭에서 취병 조형 유허비를 발견하고 조사하고 있다.

 

광산구 도촌동 산 18번지(광산구 비아)에는 조선 효종대 대사간과 현종대 병조판서를 지낸 취병 조형 유허비가 있다. 이 비는 그 형식이 특이하다. 비신이 이수와 1석이며, 비좌는 별석으로 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너무 넓어 일반적인 석비와는 구별되고 있다. 이수는 우진각 지붕 모양이며 용마루와 내림마루의 우동은 큼직하고 낙수면은 약간 경사져 있다. 비좌는 직사각형이며 2단을 이루고 있다.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조형(16061679)을 기리기 위해 그의 6세손인 광주목사(光州牧使) 조운한(趙雲漢)이 세운 것이다.

취병 조형(翠屛 趙珩, 1606~1679)은 본관이 풍양(豊壤)이고, 조선 선조 때 광주목사 조희보와 강릉최씨 사이에 태어났다. 자는 군헌(君獻)이며 호는 취병(翠屛)이다. 160610월 부친이 광주목사로 부임한 해에 비아 도촌에서 태어났다. 전설에 의하면 어머니가 출산할 때가 되었는데 당시 법도에는 관아에서 출산할 수가 없어서 비아 도촌에 있던 칠졸재 박창우의 집에서 조형을 출산했다고 한다. 조형은 1611년까지 광주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여덟 살 때 글공부를 시작했는데 열다섯 살 쯤에 이미 경서를 외웠다. 1626년 문과 별시(別試)에 합격했고 1630년에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해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한 때 부여로 유배되었다가 1636년 다시 등용된 후 어전에서 하는 문신들의 전강(殿講)에서 주역(周易)을 강의해 1위를 차지해 인조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1636년 겨울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임금을 따라가 전투를 독려하는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영덕현 수령을 자청했다.

1644년 홍문관 수찬과 교리,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어 일하다가 병조좌랑으로 옮겨갔다. 그 후 사헌부와 홍문관, 사간원 등 여러 요직을 거쳤고 효종 때에는 형조참의, 병조참의, 충청감사,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특히 대사간으로 재직 중에 통신사로 추천되어 일본을 다녀와 부상일기(扶桑日記)라는 기행문을 썼다. 이 기행문은 17세기 한일관계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현종 때에는 경기도 관찰사,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한성판윤,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는 청나라 연경에 세 번이나 사신으로 다녀왔고, 일본에 통신사 정사(正使)로 다녀온 외교통이었다. 당대의 석학이었기에 정사로 뽑혀 외교를 한 것이다. 부상일기 기록에 따르면 그는 1655(효종 6) 4월 서울을 출발해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육로로 부산에서는 배를 타고 대마도를 거쳐 도쿠가와 막부가 있는 에도(江戶)까지 가서 외교를 했다.

부상일기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대마도주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대부분 무례하고 간사하다고 비판한 내용과 일본인들의 명분 없는 선물을 사절했다는 내용 등이다. 예컨대 에도에서 관백(關白: 집권자)이 보낸 선물 중에서 순금 다기나 백금 등 금은보화는 모두 사절했다. 그러나 정당하게 받은 물건은 아랫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정도로 청렴결백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늙은 동포가 자신을 찾아와 생계가 어려워 죽으로 연명하고 있다고 호소하자 쌀을 넉넉히 주어 보내기도 했다. 역대 통신사와 마찬가지로 조형 일행도 일본인의 요청에 따라 예절과 문장을 가르치고 시나 서화 등을 전해주어 일본 문화발전에 이바지했다.

조형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쓴 시가 일본 사찰의 승려에 의해 전해져 오고 있는 데 그 가운데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다른 나라에서 한 해가 저물어 향수(鄕愁)가 새로우니/ 오늘 이 몸은 기러기처럼 나그네가 되었구나/ 동남(東南)의 산과 바다를 다르게 여기지 마라/ 하늘은 높고 먼 데서 똑같이 보고 사랑하나니

1711(숙종 37) 조형의 증손인 조군석에게서 부상일기를 빌려 가지고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조태억의 기록에 따르면 천태산 사찰에 조형의 초상화가 걸릴 정도로 일본인들의 공경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