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천년의 숨결 호남문화유산 30선] (6) 동학 최후의 전투 ‘장흥 석대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났던 전국적인 봉기지만, 동학접주 전봉준을 주축으로 하는 전라도 중심의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전라도 고부 농민봉기를 기점으로 불꽃이 타올라 장흥 석대들에서 장엄하게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124년의 시간을 거슬러 동학 최후의 전투 현장인 ‘장흥 석대들’을 찾았다. 장흥읍 남외리 164-5번지 일대 석대들은 1894년 12월 동학농민군 3만여명과 관군·일본군이 일대회전을 벌여 양측 사망자가 2천명이나 발생한 최대 최후의 격전장이다.
석대들은 2009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지로 지정됐으며, 정읍황토현전적지, 공주우금치전적지, 그리고 장성 황룡전적지와 더불어 동학농민전쟁 4대 전적지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제 그날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1894년 11월27일 2차봉기에 나섰던 동학농민군이 태인전투에서 패배하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등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잇따라 체포되고 해산한 농민군들은 벽지로 숨거나 도피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장흥에서는 전라도 지역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다. 장흥 석대들은 당시 강진현, 전라병마절도사영, 벽사역, 장흥도호부, 자울재를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장흥, 강진 일대의 농민군은 이방언(李邦彦·1838-1895)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일본군과 관군, 유생이 중심이 된 민보군에 맞서 동학농민전쟁의 마지막 격돌이 펼쳐지게 된다. 본대에서 해산한 농민군들이 장흥으로 몰려들어 연합 농민군의 규모는 적게는 1만명에서 많게는 3만명에 이르게 됐다. 세력이 불어난 농민군은 마침내 1894년 12월3일 장흥 벽사역(碧沙驛)과 장흥부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어 4일에는 벽사역을, 그리고 5일에는 장흥부성의 수성군을 격파해 점령했다. 벽사역은 호남 제2의 역졸부대를 거느린 오늘날의 정보기관에 상응하는 막강한 기관이었으나 관군들은 겁을 먹고 모두 달아나 버렸다. 농민군은 텅빈 벽사역을 점령하고 관청 건물과 역졸들이 살던 민가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 때 장흥부사 박헌양 이하 장졸 96명이 피살된다. 연합 농민군은 계속해서 강진현과 전라 병영의 공격에 나섰다. 강진의 관청을 불태우고 병영의 화약고를 폭발시켰으며, 저항하던 관군과 병영군을 전멸시킴으로써 다시 일어서는 전기를 맞는 듯했다. 병영성, 장흥 강진일대를 점령한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대적할 전투태세를 갖추는 사이 농민군의 토벌을 위해 관군과 일본군도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주의 관군은 일본의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의 지시에 따라 영암, 장흥, 능주의 세길로 나눠 강진으로 향했다.
농민군은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죽창과 몽둥이, 저급한 조총으로는 신식훈련과 기관포로 무장한 관군과 증원된 일본군의 공격을 당할 수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양측 사망자가 2천명이상이나 되는 최대 격전이었다. 전의를 잃은 농민군은 해산해 피신하는 신세가 됐다. 전투가 끝난후 20일에는 우선봉장 이두황이 이끄는 경군이, 29일에는 출진참모관 별군관이 이끄는 경군이 도착했다.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집집마다 수색을 하며 농민군을 색출해 매일 수십명씩 잡아다가 장흥장대와 벽사역뒤 저수지둑에서 포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이방언도 장흥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은신하던 중 25일 이두황 군사에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그러나 재판에서 뜻밖에 석방됐다. 흥선대원군과의 교분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서울을 떠나 보성군 회령면(지금의 회천면) 새터에 사는 이의원(李義元)의 집에 숨어지내다 체포돼 1895년 4월25일 그의 외아들 성호와 함께 장흥 장대(지금의 서초교자리)에서 처형돼 최후를 마친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석대들 옆 산허리에는 희생된 농민군 영령을 추모하는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서 있다. 이 탑은 1992년 세워졌지만 우여곡절 끝에 12년 만인 2004년 4월25일에야 비로소 제막식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무명용사 1천165명이 묻힌 자리는 지금 체육관이 들어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편, 장흥읍 남산공원 영회당에는 동학군에 맞서 장흥부성을 수성하다가 순절한 장흥부사 박헌양 등 관민 96인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 ‘장흥동학 지킴이’ 이대흠 시인 ‘열세살 동학대장 최동린’ 동화집 펴내…숨은 인물 조명 예정 동학농민전쟁 최후의 격전장이었던 장흥은 곳곳에 동학의 숨결이 서려 있다. 특히 읍내에는 석대들뿐 아니라 농민군이 주둔했거나 전투를 벌인 관아터, 흑석장터, 건산 모정등 등 유적지가 집중돼 있다. 이러한 뜻을 기려 2015년 4월 석대산 자락에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들어섰다. 문화재청 공모사업으로 건립된 기념관은 외관이 마치 달팽이집처럼 둥글게 나선형을 이루고 있어 특이했다. 지난 18일 이곳에서 개관과 함께 ‘장흥동학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이대흠 시인을 만났다. 1994년 창비로 등단한 이 시인은 이 곳에서 비록 청원경찰 신분이지만 동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문학적 식견으로 ‘장흥동학 지킴이’로서 기념관을 빛내고 있다. 그도 동학의 후손이다. 장흥 장동면 출신으로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동학 얘기를 듣고 자라면서 자연스레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저희 고조부가 굉장한 부자였는데 딸 넷을 모두 동학접주에게 출가시켰어요. 또한 지난 2001년 옛집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아궁이에서 엽전이 한보따리가 발견됐어요”. 구한말 동학농민군들은 전답을 팔아 마련한 엽전과 짚신꾸러미를 가지고 다니며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엽전들은 당시에 사용하다 남은 것을 보관해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동학하면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북에서만 이뤄진 사건으로 기억하지만, 장흥이야말로 동학의 시작과 끝이라 할 정도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초의 봉기인 고부민란의 발단이 벽사역 부사였던 이용태가 안핵사로 가면서 탐학과 횡포를 일삼아 폭발한 것이며, 마지막 역시 1894년 12월 장흥 석대들에서 보름간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렸으니 장흥이 동학의 주무대라는 것이다.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아직 여기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아쉽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동화집 ‘열세살 동학대장 최동린’을 펴낸 바 있다. 이 동화집은 5년 전부터 구상해왔는데 작년 어린이 캠프를 운영하면서 연극 시나리오로 썼던 원고를 출판사의 요청으로 동화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는 앞으로 22살의 꽃다운 미모로 동학군에 가담한 이소사와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 약 500명을 섬으로 도피시켜 목숨을 살린 16세 소년 뱃사공 윤성도에 대해 조명해 볼 계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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