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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과수원 떠나던 날

과수원 떠나던 날

 

감나무는 통상 해걸이를 한다. 한해 흉작이면 그 다음해는 풍작이다. 감나무 스스로가 체력에 맞게 조절을 하는 모양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69년 가을 과수원의 감나무들이 대풍작을 이루었다. 나무마다 황금빛으로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부모님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수확철이 가까워지면 광주시내 상인이 찾아와 밭떼기와 마찬가지로 감나무 전체를 놓고 흥정을 한다. 그리고 계약이 성사되면 대금을 지불하고 수확에서 상차까지 모든 작업을 상인이 맡아서 처리한다.
그 해 우리집도 상인과 통거래를 하였다. 마당 근처 몇그루를 제외하곤 모두 상인에게 넘겼다. 인부 여러 명이 작업을 해서 나무괴짝에 담아 12톤 트럭 가득 싣고 갔다.
그때 기억으로 30만원을 받은 것 같다. 내가 정확히 액수를 기억하는 것은 다음해 봄 광주로 이사와서 얻은 상하방 전세금이 30만원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마지막 과수원 수입금으로 겨우 집세를 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 가족은 이듬해인 1970년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초 무렵 정든 과수원을 떠나게 되었다.
이사하던 날 아침 나는 마지막으로 학교에 갔다. 평소보다 늦게 등교하였다. 운동장에 덩그러니 그네가 서있었다. 늘 타보고 싶었으나 다른 아이들에게 밀려 제대로 타보지 못한 그네였다. 타보고 싶었으나 왠지 흥이 나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가 마지막 수업을 들었다. 2교시가 끝날 무렵 동네 아는 삼촌이 아버지의 부탁으로 나를 데리려 왔다. 아마도 교무실에 들러 학적부 등 서류를 가지고 광주 전학하는 학교로 가져다주어야 하기 때문에 보내신 것 같았다. 선생님은 나를 불러 학생들에게 작별인사를 시켰다. 그렇게 나는 정든 과수원을 떠나 광주 양동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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