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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과수원 밖 풍경

과수원 밖 풍경

 

과수원 밖 풍경은 어떠할까. 우리집은 응암과 미산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했다. 탱자울타리 밑으로는 손바닥만한 논이 있었다. 집앞 신작로는 오솔길처럼 좁아서 소달구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집앞 길옆으로 무덤이 3기가 있어서 간혹 올라가서 놀았다. 그러면 무덤 주인집 아들이 발견하고는 주의를 주곤했다. 그는 나와 같은반 친구였다.
집 툇마루에서 바라보면 이 모든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더 멀게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아읍내와 광주를 오가는 버스들이 보였다.
동네에서 비아읍내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수시로 사람과 수레바퀴의 움직임이 들려왔다. 내가 기억하는 거리의 풍경은 여느 시골과 크게 다르지 않다. 등에 화장품 쇼케이스를 짊어지고 동, 동 북을 치는 동동구루무 장수, 자전거에 아이스께끼통을 싣고 파는 아이스께끼장수, 물통에 소피나 돼지피 선지를 이고온 아줌마, 놋쇠그릇을 달구어 주는 사람이 인상적이었다. 더러는 전도하러 오는 사람, 산아제한을 권장하는 보건소직원, 그리고 신문과 편지를 전해주는 우편배달부가 다녀간다. 학교에서 집으로 올 때는 소달구지에 몰래 올라타기도 했다.
학교 가는 길은 종종 여러 가지 사건을 접하게 된다.
어느날 집을 나서서 아이들과 함께 학교 가는 길이었다. 마을 어른이 “저 쪽 길가에 사람이 죽어 있으니 보지말고 빨리 학교에 가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오히려 호기심이 발동해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 한분이 한복차림으로 죽은 채 논 수로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아저씨 한분이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천원짜리 지폐를 꺼내고 있었다. 죽은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돌아다니다 한밤중 길을 잃고 헤매다 쓰러져 사망한 것 같았다. 며칠 전 아들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집에 찾아와 아버지에게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혹시 이런 노인을 보지 못했냐”고 묻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으로 시신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학교가는 길 중간쯤에 커다란 방죽이 있었다. 우리는 심심하면 신작로의 돌을 주워서 물수제비를 뜨곤 했다. 납작한 돌을 골라 회전을 많이 나도록 던지면 보다 멀리 여러번 점프를 만들어낼 수 있다.
봄날이면 신작로 길가 아카시아꽃을 따먹었다. 아카시아꽃은 향기도 좋지만 달콤한 맛이 난다. 수시로 군용트럭이 오고갔는데 저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면서 오는 모습을 보곤 먼지가 부는 반대방향으로 피하느라 우왕좌왕 소란을 벌였다. 여름에는 소가 써레질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겨울에는 칼바람이 분다. 평지여서 극락강을 타고 불어온 바람은 혹독하게 추웠다. 우리는 가방으로 얼굴을 막고 논둑 아래로 몸을 수구린채 낮은 포복으로 한참을 기어갔다.
응암마을에 군인 출신으로 5.16때 군수가 된 송인섭씨 과수원이 있었다. 그집 조카들이 큰 말을 타고 승마를 즐겼는데 우리집 앞을 지나가는 모습이 참으로 멋져보였다.
어느 여름날 나는 집 밖에서 놀다가 피곤해서 마로니에 나무 그늘밑 풀밭에서 누워 있었다. 그랬더니 동네 누나가 “여기서 잠들면 뱀이 문다”고 해서 깜짝 놀라 집으로 돌아온적이 있다.
또 한가지 기억나는 것은 지난번 소개한 바 있는 미산마을 김익주라는 친구가 우리집을 찾아와 “담임선생님이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고 있으니 가서 인사를 드리자”고 했다.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저수지로 갔다. 선생님이 저수지 둑 바위에 앉아 낚시를 하고 계셨다. 나는 인사를 하고나서 옆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런데 친구는 선생님곁에 바짝 붙어서 조잘조잘 대화 장단을 맞추었다. 나는 혼자 뻘쭘해져서 말도 않고 집으로 와버렸다. 그 다음날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왜 말도 없이 가버렸냐”고 혼내셨다. 그때 나는 선생님이 낚시를 하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서 서먹서먹했다. 선생님은 교실에서 학생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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