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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가라츠<唐津>의 추억

가라츠<唐津>의 추억
박준수 편집국장


입력날짜 : 2013. 08.20. 00:00

8·15 광복절 직후인 지난 주말 순천왜성을 답사했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바닷가 구릉지대에 자리한 순천왜성은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가장 극적인 역사현장이다.

1598년 9월에서 노량해전이 있었던 11월 19일까지 2개 월 동안 순천만의 장도와 광양만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공방전이 펼쳐진 정유재란 최후의 전투현장이며, 이순신 장군이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둔 후 전사한 유서 깊은 곳이다.

한낮 폭염을 무릅쓰고 오른 순천왜성은 곳곳에 축성의 흔적이 뚜렷히 남아 있어 400여년 전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소서행장이 머문 천수각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ㄱ’자 형 입구의 성문기단이 우뚝 솟아있고, 곧 이어 넓고 평평한 훈련장과 함께 천수각의 석축 기단이 제단처럼 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천수각 기단에 올라보니 주변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3년 전(2010년) 8월 한일합방 100주년 기획특집 취재차 방문했던 일본 사가현 가라츠(唐津)의 히젠나고야성이 오버랩되었다. 성터의 모습이 히젠나고야성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히젠나고야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전국의 다이묘(영주)들을 불러모아 세운 출병기지이다.

이곳에 기지가 건설되기 전 인구는 1천500명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그런데 전국에서 160명의 다이묘와 휘하의 군사들을 집결시켜 순식간에 10만이 넘는 도시가 되었다.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은 부산과 직선거리로 190㎞에 불과해 한국과 최단 거리에 위치하고 중간에 두 개의 섬(이끼, 대마도)이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어 최적의 전략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맑은 날에는 육안으로도 대마도가 보인다고 한다.

이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 명의 왜군을 조선에 출병시켜 7년간 전쟁을 벌였다.

조선의 후손으로서 현장에서 느끼는 감회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란 속에서 고초를 겪어야했던 조선 백성의 참상을 생각하면 ‘풍진의 땅’ 한반도의 아픔이 뼛속 깊이 파고든다.

순천왜성뿐 아니라 남도 곳곳에는 일본이 자행한 만행의 자국들이 선명히 남아있다. 동학농민군을 한곳으로 몰아넣고 무자비하게 진압한 장흥 석대들이 그러하며, 일제 36년간 식량을 약탈해간 거점 역시 목포항이다. 목포 원도심에는 식민지 당시 우리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던 일본인 거류지가 여전히 상흔처럼 남아 있다.

이처럼 일본은 이웃한 한반도를 지속적으로 침략하고 괴롭혔음에도 진정성 있는 사죄나 반성의 태도는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독도영유권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최근에는 헌법을 개정해 다시금 우경화하려는 반역사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특히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총리는 2차대전 패전일인 지난 15일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아시아국민에 대한 사과와 전쟁포기 결의를 하지 않아 논란을 일으켰다. 또 아베 총리는 이날 2차대전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직접 참배하는 대신 대리인을 통해 제물비용을 보냈다.

일본 지도층이 400여년 전 ‘가라츠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일본이 가라츠의 망상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단단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단결된 힘으로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남도 곳곳에 산재한 항일 유적을 생생한 역사교훈의 교육장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일본은 자국내 전쟁유적을 포장해 침략자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교묘히 희석시키며 상대국의 교류·우호의 매개체로 활용하고 있다.

취재중 만난 히가시나카가와 나고야성 박물관장은 “나고야성박물관은 임진·정유왜란의 반성위에서 나고야성터를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오랜 교류의 역사속에서 이해하고, 양국의 교류와 우호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도 일본 관련 역사유적을 단지 일제잔재 청산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새기는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 아픈 역사도 엄연한 우리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