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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호남은 과연 '아껴둔 땅'인가

호남은 과연 ‘아껴둔 땅’인가
박준수 편집국장


입력날짜 : 2013. 10.01. 00:00

한 때 정치권 안팎에서 호남을 일컬어 ‘아껴둔 땅’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호남이 지금은 비록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지만 머잖은 장래에 개발의 훈풍이 불어와 ‘기회의 땅’으로 바뀔 거라는 소망이 담긴 말이었다. 특히 정보화 시대가 도래한 2000년 대에 들어서 이 말은 산업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지역이 오히려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섣부른 기대감까지 곁들어져, 말 그대로 장밋빛 희망을 부풀게 했다.

‘서해안 시대’이니 ‘환황해권 경제’이니 하는 거창한 말들도 그 당시에 잉태된 조어(造語)들이다.

그리고 이 말은 선거 때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단골 공약으로 등장시키며 유권자의 심리를 자극하는 수사(修辭)로 활용되었다. 호남지역 주민들 역시 “조만간 좋은 시절이 오겠지”하며 ‘아껴둔 땅’에서 벙그러질 신명나는 세상에 대한 설레임을 가슴속에 간직해 왔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아껴둔 땅’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MB정권에 된서리를 맞은데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마저 개선의 조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호남의 실상을 살펴보면 섬뜩 놀랄 만큼 삭아들고 있다. 최근 발표된 ‘충청인구의 호남 추월’이 단적인 예이다. 지난 5월 주민등록인구 기준으로 호남권의 인구는 524만9천728명, 충청권은 525만136명으로 충청권이 408명 더 많았다. 8월엔 호남권 524만9천747명, 충청권 525만9천841명으로 석 달 만에 격차가 1만94명으로 벌어졌다. 현재 호남권은 인구가 정체상태이지만 충청권은 최근 매달 3천여 명씩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은 차기 대선이 열리는 2017년엔 충청권 인구가 호남권보다 31만 명 가량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80년까지만 해도 충청인구는 호남의 70%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충남의 천안·아산·당진을 중심으로 대기업들의 투자가 급증하고, 특히 지난해 세종시가 출범하면서 충청권 인구 유입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반면 산업화 기반이 부족한 호남은 70년대 이후부터 대규모 이농현상 등으로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처럼 호남인구가 감소하는 원인은 물론 열악한 경제환경 탓이 크지만 정치적 소외에서 비롯되는 ‘심리적 빈곤’도 한 몫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물결은 자본의 집중을 심화시켰고 지역간, 계층간 빈부격차를 확대시킨 게 사실이다. 또 호남의 역외유출 인구의 약 35%가 수도권(서울·경기)에 몰리는 배경도 취업 등 경제적 여건이 상대적으로 양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의 연속적인 집권실패로 인해 정치적 상실감이 깊은데다 ‘전라도 홍어’ 등 부정적인 낙인효과가 가해져 호남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이 심히 훼손되고 있는 상황이다. 산업화 낙후에 이은 정치적 고립현상이 호남인의 가슴에서 희망을 지워버리고 절망의 그늘을 짙게 드리우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100% 행복한 대한민국’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또한 지난해 대통령후보 시절 광주를 방문했을 때 “광주는 문화가 경쟁력이 있고, 전남은 관광자원이 풍부하다”고 덕담을 한 적이 있다. 온화한 미소로 또렷하게 밝힌 그 덕담은 재임기간 내내 유효하다고 본다.

지난 대선에서 호남의 몰표는 ‘충동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자기조직화’의 전조현상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모래더미는 어느 경사면까지는 일정한 각도를 유지하지만 임계점을 지나면 스스로를 무너뜨려 안정적인 각도를 유지할려고 한다. 이를 과학계에선 ‘자기조직화’라고 한다.

어떤 생명체이든 극단적인 위기상황은 자기 보호본능을 극대화시킨다.

필자가 지난 5월 미국 뉴욕을 방문했을때 느낀 것 중 하나는 ‘한국이 미국보다 훨씬 살기 좋은 나라’라는 확신이다. 다만 지역감정과 죽기살기식 정치투쟁만 없다면.

이젠 정치도 융복합이 대세이다. 반대세력에 대한 초토화 전략에서 포용전략으로 다가서는 정치적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그러한 정치적 균형이 복원될 때 비로소 호남이 ‘아껴둔 땅’으로서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100% 행복한 대한민국’ 건설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