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아리랑]성 쌓고 무기 제작까지…호남의병 본거지
['경술국치 100주년'기획] 新아리랑
<제1부> 항일운동 숨결을 찾아서 (3) 호남의병과 화순 쌍산의소
입력날짜 : 2010. 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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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터와 전투 결의 다진 만세바위…
당시 훈련모습 ‘활동사진’처럼 스쳐가
동학농민전쟁의 자취가 어린 장흥석대들과 강진병영성에 이어 취재팀은 한말의병 전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말 항일의병봉기는 1896년부터 1909년까지 기간동안 3차에 걸쳐 전개된다.
이상식 전남대 명예교수의 논문 ‘한말·일제시기 광주·전남지역의 민족운동’에 따르면 1차의병은 1896년 1월부터 위정척사파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에서 봉기하기 시작했다. 유인석의 충주의병, 민용호의 관동의병, 경상도 안동의병이 활발했다.
다른 지방에 비해 호남에서 1차 의병이 뒤늦게 일어난 것은 동학농민혁명의 상처가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2차의병은 일제가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정치를 실시하자 각계각층에서 들불처럼 번져갔으며 호남의병이 전국의병의 중심을 이루면서 가장 격렬한 항쟁이었다. 면암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2차의병은 전국적으로 의병봉기를 독려했고, 전라도를 휩쓸면서 호남의병을 이끌었다. 이어 3차의병은 군대해산 이후인 1907년 9월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을 이룬 것은 호남의병이었고 특히 광주·전남의병이 그 핵을 이루었다.
3차호남의병은 광주를 중심으로 서북지방을 무대로 활약했던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와 동남지방을 무대로 활약한 양회일과 이백래의 호남창의소, 그리고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심남일, 안규홍,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대, 조경환, 김영백, 김동수, 김원국, 강사문, 이기손, 이대국 등의 많은 의병활동이 있었다.
1907년 9월에 봉기한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김용구통령, 동학군으로 활동했던 김태원 선봉장을 중심으로 광주·장성·영광·함평·나주·담양·고창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김준·김율 형제가 죽자 뒤를 이은 전해산이 남은 의병대를 수습해 나주·함평·영광·장성을 무대로 활동했는데, 때로는 조경환·심남일 의병대와 연합전선을 펴기도 했다.
이밖에 많은 의병장들이 광주·전남 각지에서 항일의병 활동을 펼쳤다. 전반적으로 볼 때 1907년 가을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1908년 봄부터 1909년 가을 일제에 의해 실시된 이른바 ‘남한대토벌’ 때까지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연도별로는 1908-1909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취재팀은 심홍섭(46)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의 안내로 3차 의병기간중 전남 동남지방을 무대로 활약한 양회일과 이백래의 호남창의소가 봉기한 ‘쌍산의소’를 찾아나섰다.
심 위원은 “‘쌍산의소’는 양회일, 이백래 등이 주축이 되어 1907년-1909년까지 활동한 호남창의소의 거점지역으로 화순 이양 계당산 일대에 의병성, 막사터, 무기제작소, 유황굴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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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서고군중문(誓告軍中文)을 발표해 “동지들이 합심해 5적을 섬멸하고 이등(伊藤)을 죽여 국가의 수치를 갚기 위해 서로의 지킬 바 5조를 발표해 민폐를 없애고 통솔을 잘따르며 이를 위반할 때는 군율을 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쌍산의소 의병은 계당산에 마을주민들을 동원해 의병성을 쌓고 막사를 지어 군영을 구축했다. 그리고 유황굴에서 화약을 제조하고 대장간에서 철을 주조해 무기를 만들어 장기적인 항전채비를 갖췄다. 심 위원은 “쌍산의소 막사에서 200여명의 의병이 생활하며 훈련을 받았다”고 말했다.
양회일부대는 3월9일 능주로 진격해 군청과 헌병분견소 및 세무서를 습격해 무기를 노획하고 왜인의 집에 불을 질렀다. 또한 다음날 화순관아와 분견소를 습격해 전선을 끊고 건물을 불태웠으며 양총과 총탄을 노획하고 일진회원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어 3월11일 정오에 동복군청과 왜분파소를 습격한 후 광주로 향하다 경계지점인 도마산(도마치)에서 적의 추격을 받아 대장 정세현이 죽고 양회일, 임창모, 이백래, 안찬재, 유태경, 신태환 등 6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재판을 받아 양회일, 임창모는 15년의 유배형에, 이백래, 안찬재 등은 10년의 유배형을 받아 지도에서 지내다가 1907년 12월에 순종 즉위 은사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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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흐른 계당산 막사터는 돌무더기가 고스란히 남아 당시 이곳에서 항전의지를 불태웠던 의병들의 훈련모습이 활동사진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전투를 떠나기전 결의를 다진 만세바위는 금방이라도 의병이 뛰쳐나와 출전채비를 갖출 것같은 연상을 불러일으켰다. 막사터를 둘러본 후 산길을 따라 의병마을로 향했다. 굽이진 산길은 승용차 한대가 넉넉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잘닦여 있어 올레길이나 둘레길처럼 걷기코스로 개발하면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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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상식 명예교수는 “쌍산의소는 서북지방을 무대로 활약했던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와 함께 호남의병의 양대 축이었다”면서 “특히, 스쳐가는 의병활동지역이 아니라 한곳에 머물면서 의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제작하는 등 계속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본거지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특별취재팀
의병활동은 호남정신의 표출
이 상 식 전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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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은 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독점적으로 침략을 자행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투쟁이며 광주·전남이 그 중심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최후까지 지켰다.
광주·전남인들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항상 생명을 바쳐 나라를 구했고 왜란과 호란때에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러한 정신은 나라가 망한 일제시대와 분단과 독재로 이어진 해방이후에도 계승되어 민족·민주운동에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호남인들이 지녀온 정의감과 애국심이 중심을 이룬 호남정신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거룩한 정신은 내재적으로 전승되어오면서 상황에 따라서 여러 모습으로 발현되었던 것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변혁기에는 고려왕조를 지키려는 의로운 정신과 행동으로 나타났고 세조의 찬탈과 연산군의 학정에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과 불굴의 선비정신으로 표출되었다. 사화와 당쟁에서는 정론과 은둔을 택했다. 그리고 왜란과 호란에서는 나라를 구하는 의병활동으로 이어졌으며, 실학이 대두될 때에는 현실비판의 이론적 배경으로 역할했다. 외세를 물리치고 바른 세상을 만들자는 동학농민혁명이나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자는 의병활동은 모두 호남정신인 정의감과 애국심의 표출인 것이다.
이러한 호남정신은 정의와 애국을 택해 고고하게 살아온 분들과 그들의 뜻을 이은 후손들과 그들의 주변에서 존경하면서 지켜본 사람들에게 깃들어지는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그러한 정신이 계승되어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했고, 한말의병의 중심을 이루면서 나라와 민족을 구했으며 5적 암살단 활동을 통해 을사조약으로 나라를 판 역적들을 응징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는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게 했으며, 해방이후에는 분단을 극복하고 독재를 타도하는 민족·민주운동을 계속하게 해 근·현대사의 주류를 이끌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의롭고 나라를 사랑하는 호남정신의 유산을 이어받아 민주화의 완성과 분배정의의 실현, 그리고 남북통일을 앞당기는데 헌신적인 역할을 해야할 책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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