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아리랑]日人들 온갖 수단 동원 토지침탈에 혈안
['경술국치 100주년'기획] 新아리랑
<제2부> 경제주권운동 (6) 목포 개항기
입력날짜 : 2010. 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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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 앞세워 삼학도·고하도 불법 매수
농민들 너무나 궁핍 일제 고금리 허덕
전라도 사람들에게 목포는 아련한 슬픔이 배어있는 곳이다. 이난영의 ‘목포의눈물’의 애잔한 가락이 가슴 밑바닥에 고여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현대사의 굴곡이 깊게 패어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목포가 역사의 전면에 떠오른 것은 조선의 국운이 쇠잔한 시기와 맞물린다. 열강들이 봉건주의의 깊은 잠에 빠져든 동아시아에 근대식 군사력을 앞세워 탐욕의 야욕을 드러내면서 한반도의 끝자락에 자리한 한산한 어촌 목포의 운명도 역사의 격랑에 휩쓸린 것이다.
신아리랑 제2부 경제주권운동은 한반도의 식량기지인 전남이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어떻게 수탈을 당하고, 이에 맞서 우리민족이 민족자존과 경제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가열차게 투쟁해왔는가를 4차례에 걸쳐 살피고자 한다. 특히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목포의 개항전후 맥락을 더듬어보고 이러한 식민지의 그림자가 오늘의 역사에 어떻게 투영돼 있는지 현지 취재를 통해 조명해본다.
춘삼월 함박눈이 계절의 시계바늘을 되돌릴 것처럼 거세게 휩쓸고간 지난 11일 목포를 찾았다. 항구도시 목포는 이른 봄이면 바람결이 코끝에 알싸하게 걸린다. 겨울과 봄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양 맞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에 체감온도는 더욱 한기가 느껴진다.
목포시청에서 김양희 학예연구사를 만나 100여년전 개항기 흔적을 더듬어보기로 했다. 목포에서 자라나고 목포대 사학과 졸업후 학예연구사로 17년째 일하고 있는 김씨는 목포의 근대문화유산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취재팀은 먼저 목포방어의 요새이자 개항의 시발점인 목포진터를 찾았다. 지정학적으로 목포는 광활한 곡창 나주평야를 끼고 도는 영산강이 서해안과 만나는 곳일뿐 아니라 서해안의 여러 섬들을 아우르는 위치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남과 영남 일부지방의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로의 길목이었다. 목포의 지명도 이같은 ‘영산강 길목에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허름한 주택들이 밀집해 달동네를 이루고 있는 목포진터는 표지석이 당시의 흔적을 전해줄뿐 한세기전의 수군요새를 짐작키는 어려웠다. 목포시는 이 일대 주택 30여채를 매입, 주민들을 이전시키고 원래의 만호진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목포는 1897년 개항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만호진이 설치돼 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기지로서 역할을 제외하곤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제가 식민지 경영전략의 일환으로 목포를 4번째 개항장으로 낙점하면서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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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이 되면서 일인들은 유달산 남서쪽 아랫자락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송도(지금의 동명동 어판장부근), 서쪽으로는 온금동 어항까지의 약 1㎢의 임해지대를 방조제를 쌓아 매립해 일인거류지로 조성했다. 시가지는 격자형 도로망 체계를 갖추었고 도로폭은 대략 10m정도였는데 지금도 당시의 도로폭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곳은 한인거주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한인들은 주로 유달산기슭에 터전을 잡고 현재의 북교동, 죽교동, 남교동 등에 밀집해 조선인 마을을 형성해나갔다.
일인거류지중 당시 1급 택지는 유달산 남동측 기슭의 비매립지로 이곳에는 일본영사관이 자리잡았다. 일본영사관 건물은 목포 최초의 서양식건물이면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김양희 학예연구사의 안내로 옛 일본영사관에 들어서니 근대역사문화관으로 활용하기 위한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건물 뒤편 산기슭에는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방공호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산에는 봉안전이 설치돼 신사참배가 이루어졌었는데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 운동 일환으로 봉안전 건물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영사관 건물에서 시가지를 내려다 보니 일인 거류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 일대에는 경찰서, 우체국,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등 수탈의 주요 기관들이 한데 몰려 있었다.
이 가운데 동척건물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상징이었다. 1920년 건립된 이 건물은 전남 각지에 소재하고 있던 17곳의 농장을 관리하였으며, 동척지점 가운데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둔 제1의 지점이었다. 창립당시에는 형식적으로는 한일양국의 이중국적을 지닌 회사로 출발했으나 1910년 국권상실과 더불어 일본국적의 회사가 됨으로써 식민지경영의 수탈창구 역할을 수행하면서 성장했다. 목포지점의 경우 당초 1909년 영산포에 동척출장소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목포가 개항지로 급속히 성장하자 1920년 6월 이곳으로 이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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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한토지침탈이 본격화된 시기는 朝日수호조규가 체결된 고종13년(1876)부터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까지로 보고 있다. 이때의 토지침탈에는 사기와 횡취(橫取), 약탈과 강점 등 악랄한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일제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토지침탈을 시작해 점차 내지로 확대해나갔다.
당시 목포조계장정에는 토지원가만 납부하면 사유지처럼 경매를 거치지 않고 그 나라 영사관부지를 매입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었는데, 일본은 대금도 납부하기전에 영사관 부지를 지정하고 지계발급을 요구하는 등 일방적으로 토지점거를 시도하기도 했다.
일제 토지침탈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삼학도의 토지약취이다. 삼학도의 토지문제는 목포가 개항되기 2년전인 고종 32년(1895년)에 이미 일본 낭인 澁谷龍郞이 당시의 옛 목포진 관리 김득추(金得秋)로부터 불법으로 매입한데서 발단되었다. 삼학도는 당시 국유지였기 때문에 조선정부의 허가없이는 매매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지방수령(무안감리)을 통해 이 매매계약을 철회케 했으나 일인의 거부로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와같은 삼학도의 토지문제는 문서에 소홀하고 상거래 관행에 익숙치 못한 조선인의 약점을 이용해 일본낭인이 부당한 방법으로 토지를 약탈한 표본인 것이다.
배종무 전 목포대총장의 ‘목포개항사연구’(1994)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부동산을 취득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방법이 매우 교묘했다. 유형별로 살펴보면, 매매증서에 매수인의 이름을 공백으로 해놓은 수법, 신용이 확실한 한국인을 소유자의 명의로 하는 수법, 저당계약을 설정하고 훗날 원리금 반환, 저당권 해지가 될 수 없게 증서상의 금액을 과대하게 해두는 수법, 표면상으로는 장기저당계약을 설정하고 계약연한이 경과하면 소유권을 이전하는 수법, 저당증서와 함께 방매증서 혹은 조건부 방매증서를 붙이는 수법 등 거래의 실제에서 여러 가지 탈법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다.
삼학도 토지문제와 더불어 개항초기 일본의 또 하나의 토지침탈사건이 고하도(高下島) 사건이다. 고하도에서 일어난 토지문제는 인천의 월미도, 부산의 절영도, 마산의 율구미사건과 같이 러일 양국세력이 서로 맞서서 격렬하게 이권을 추구했던 사건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육군副領이 직접 나서서 군함을 앞세우고 통역을 시켜 매입한 토지의 지권발급을 지방수령에게 요청했고, 일본인은 군기밀비를 투입해 조선인 고관을 앞세워 토지를 매입한 뒤 일본과 영구계약을 체결해 고하도 토지의 대부분을 침탈했다. 이 사건을 주도했던 일본인은 삼학도 사건을 주도했던 일본 낭인 澁谷龍郞이 고하도의 영구차용계약을 체결한데서 비롯된 사건으로 일본정부가 조선초기에 일본의 浪人들을 시켜 조선의 토지를 불법으로 침탈한 전형적인 사건이다.
이밖에도 일본인들은 조선농민의 무지와 무기력 또는 사행심을 교묘히 이용해 고리대적 방법과 기타의 악랄한 수단을 동원해 토지를 매수했다. 이 당시 일본인들은 무일푼으로 조선에 들어와서 함부로 조선인의 토지를 빼앗고 우리 동포의 생활을 위협했으니 일본의 토지침탈이 얼마나 폐해가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에대해 배종무 전 총장은 ‘목포개항사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서술했다. “이 당시 농민들은 지배층의 가렴주구로 너무나 궁핍, 피폐해 있었고 고금리에 허덕이고 있었다. 조선관원은 일본인에 대해 무기력했을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파렴치한 매국적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토지침탈을 방조하고 있었다”.
“목포, 경제침략에 맞선 곳”
배종무 前 목포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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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는 개항이전 만호진(萬戶鎭)이 설치된 작은 포구였다. 그런데 19세기말 제국주의 열강들의 압력에 의해 1887년 조선의 네 번째 개항장이 되었다.
목포 개항은 형식적으로는 타국과의 조약에 의한 조약항이 아니라 조선정부가 스스로 개항을 선포하는 자개항(自開港)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강요에 의한 개항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다른 개항장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개항 이후 목포항에는 일본인들이 다수 몰려와 조계(租界)를 장악하고 무역업과 토지침탈에 열을 올렸다.
결국 목포항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미곡과 면화 등의 농산물을 일본으로 실어가고 일본의 공산품을 수입하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게된 것이다. 이러한 역할은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한 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처럼 목포항이 비록 일본측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 개항되고 또 식민지 경영을 위한 창구로서의 구실을 한 항구였지만, 이곳에는 많은 우리 동포들이 모여들어 인구상으로 급격한 팽창을 보여 식민지시기에는 전국 6대 도시에 들어갈 만큼 급성장을 보였다.
개항초기 이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게된 우리 동포들은 혹은 중개상으로, 혹은 부두 노동자로서 생활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일본의 부당한 경제적 침략에는 다함께 결연히 대응했다.
이로인해 1898년부터 5년간에 걸쳐 일어난 반일 목포부두노동쟁의같은 경우는 한국노동운동사에서 그 시발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 그러한 반일노동운동의 전통은 식민지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목포지역에서의 노동운동은 대단히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목포는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이에 맞서는 한국의 민중들이 첨예하게 맞선 곳이며, 그러한 점에서 목포지역의 근대사는 한국근대사의 한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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