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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리랑

(2)호국의 요새-강진 병영성·수인산성

[新아리랑]역사의 아픔 딛고 옛모습 복원 한창
['경술국치 100주년'기획] 新아리랑
<제1부>항일운동 숨결을 찾아서
(2)호국의 요새-강진 병영성·수인산성


입력날짜 : 2010. 01.20. 00:00

세월의 흔적 고스란히
복원공사가 진행중인 병영성 모습. 올해는 4개문 가운데 정문에 해당되는 남문루를 복원하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한다. 성너머로 보이는 산이 수인산이다.
500년간 남해안 왜구 방어의 ‘총본산’
동학농민군에 의해 소실 1895년 폐영
임란 저항지 수인산성 항일원혼 서려
심남일 의병장 중심 항전 수많은 전과


장흥 석대들을 뒤로 하고 강진병영으로 발길을 옮겼다. 경인년 새해들어 몰아닥친 한파와 눈세례로 남도의 들녘은 고즈넉한 銀세계를 이뤘다. 산비탈을 따라 굽이진 길이며, 논밭과 산등성이에 뿌려진 눈발은 모든 인간의 경계를 지우고 자연만의 길과 지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역사속 남도의 산하는 아직도 핏빛 울음이 그렁그렁 망울져 있다.

 먼저 찾은 곳은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전라병영성. 맵찬 칼바람속에 복원중인 성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안내를 맡은 강진군청 관광개발팀 김동남씨와 김성우 와보랑께박물관장(63)과 함께 복원중인 남문 성벽에 올라보았다.
매섭게 몰아치는 칼바람 소리가 절도사(節度使)도 만호(萬戶)도 없는 병영에 왜구를 격퇴하던 군사들의 함성인듯 귓가에 맴돌았다. 지난 1998년 시작한 복원사업은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채 절반도 진척되지 않은듯 보였다. 일제시대 성터에 지은 병영초등학교 이전이 늦어진데다 사전 유구발굴 조사와 고증을 통한 원형복원에 치중하다 보니 공정이 더디게 진행된 것이다.
올해는 4개문 가운데 정문에 해당되는 남문루를 복원하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도 5-10년은 더 걸려야 완벽한 옛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라병영성은 원래 광주(옛 광산현)에 있었다. 조선초 남해안에 왜구들이 자주 침입해 약탈이 심하자 태종 17년(1417년) 광주에 있는 성이 폐쇄되고,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馬天牧)이 병영성을 축성했다. 1895년 ‘兵營營誌’에는 창설 당시 마천목이 일망대에 올라가서 활을 당기며 말하기를 “후세에 활을 쏘는 자들중에서 내가 쏜 곳까지 미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적의 화살도 이르지 않을 것이니 내 화살이 떨어진 곳에 성을 쌓도록 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병영성 성곽의 총 길이는 1천60m이며, 높이는 3.5m, 면적은 9만3천139㎡(2만8천175평)이다. 현재 사적 397호로 지정돼 있다.
수령 700년 은행나무

하멜이 1656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되어 7년 동안 살면서 자주 찾았던 수령 700년된 은행나무를 김성우 와보랑께박물관장이 설명하고 있다. 주변의 ‘하멜 기념관’과 함께 하멜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다.

 강진 병영성 주둔군과 관련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에는 정군(正軍) 498명, 수성군(守城軍) 51명, 조역군(助役軍) 163명, 장인(匠人) 141명이 소속돼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로 대략 350명이 주둔했다가 대폭 줄어들었다.
 전남과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였던 병영성은 동학혁명군에 의해 소실되고 만다. 제1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흥 동학농민군은 1894년 12월 4일 벽사역과 12월 5일 장녕성(長寧城)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강진으로 진군한다.
12월 7일 오전 8시쯤 1만여명이 넘는 농민군은 강진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안개가 자욱히 깔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가운데 성을 포위한 농민군은 대포 한 방을 쏘아 위협한 다음 “죄없는 민간군사는 모두 당장 성을 나가라. 혹 아전·별포군 등과 섞여 피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소리를 들은 성내 민간군사는 곧 와해됐다.
 강진현을 함락시킨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강진병영을 치고자 세 갈래 길로 나누어 12월8-9일 부대를 움직여 병영성을 포위했다. 병영성을 포위한 농민군은 12월10일 아침을 먹고 병영성을 총공격했다.
조선말 의병 전적지

병영에서 약 3km 거리에 위치한 수인산성은 해발 561m로 정상에 노적봉이 있으며 병영성과도 군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산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수인별장이 주재하며 연락을 취하고 임진왜란 시에는 강진과 장흥, 영암, 보성 등 인근지역 주민들의 피난처이자 최후의 저항지였다. 한일합방 전후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조선말 의병투쟁의 요새이기도 했다.
일제히 포를 쏘며 4개의 성문으로 돌진해 성곽의 목책을 불지르고 함성을 지르며 성으로 올라 성문을 열었다. 성안에는 1천명의 수성군밖에 없었다. 양측간 큰 충돌은 없었으나 수성군이 화약을 폭발시켜 창고를 불태우는 바람에 농민군의 희생이 적지않았다. 이때 성내 동헌, 내아, 객사 등 관공서와 민가 대부분이 불탔다.
 당시 일본군은 전주(11월24일)에서 남하해 광주(12월8일)를 거쳐 12월10일 이규태가 이끄는 좌선봉진, 이진호가 지휘하는 교도중대와 함께 나주에 진입해 동학농민군과 대회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진병영성은 1895년 갑오경장의 신제도에 의해 폐영된다. 결국 500년간 왜구를 막아내기 위한 호국의 성지 강진병영성은 왜의 전략에 의해 무너지는 비극을 겪게된 셈이다.
 병영초교 행정실직원으로 퇴직한 김성우 관장은 “성내에 일제시대 초등학교가 들어서고 이후 6.25 전란과 신작로 개설공사를 하면서 성벽 돌들이 많이 훼손됐다”고 설명했다.
 한편, 병영성은 서양에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소개했던 하멜이 1656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되어 7년 동안 살면서 노역했던 곳으로서, 주변의 ‘하멜 기념관’과 함께 하멜 관련 역사문화 유적지로서의 역할도 크다.
 병영성과 더불어 항일 호국의 숨결이 서린 곳이 수인산성이다. 병영에서 약 3km 거리에 위치한 수인산성은 해발 561m로 정상에 노적봉이 있으며 병영성과도 군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산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수인별장이 주재하며 연락을 취하고 임진왜란 시에는 강진과 장흥, 영암, 보성 등 인근지역 주민들의 피난처이자 최후의 저항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의하면 “수인산석성은 1천396보(步)로서 안에 샘이 여섯인데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동국여지승람(1481)에는 길이 3천756자, 높이 9자의 기록과 수인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장흥 억불산 봉수로부터의 적변을 병영성에 중계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수인산성은 을사늑약과 한일합방 전후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조선말 의병투쟁의 요새이기도 했다. 함평 출신 심남일(沈南一, 1871-1910) 의병장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왜에 항거할 것을 결심하고 장성, 영광, 남원, 보성 등지에서 일병과 항전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또 1907년 11월 격문을 각지에 전해 의병을 모집해 훈련을 시키고 전 진을 조직했다. 1908년 2월 강진 옴천 오치동으로 행군하던중 일병 100여명과 교전해 일병 수십명을 사살하고 격퇴시켰다. 이해 4월15일에는 수인산성에 입성해 성벽을 보수하고 거점으로 삼았다.
‘마르지 않는’ 우물

수인산성안에 있는 우물.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산성안에 여섯 곳의 샘이 있는데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기회를 노리던중 장흥 유치면 관동에서 일경이 습격해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바위밑에 의병 1개부대를 매복시켰다가 일병을 습격해 3명을 사살하고 잔당을 격퇴시켰다.
 9월20일에는 수인산성에 본진을 두고 대치해 일부병력을 대기시키던중이었는데 왜병 30여명이 유치면 삼풍리에 집결중이라는 정보를듣고 심의병장은 선봉장 강현수로 하여금 장병 100여명으로 토벌하게 하였던 바 그중 20여명을 사살하고 격퇴시켰다.
그러나 전고의 누적으로 눕게되자 선봉장 강우경과 함께 수인산성을 빠져나와 영암의 분토등에서 신병치료를하던중 일병 300여명이 동북서 삼면에서 내습해와 왜병과 싸우다 후군장 최우평과 20여명이 전몰하였으나 도총장 김도숙이 의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20여명을 사살했다.
이후 여러곳에서 일병을 무수히 사살하였고 5월 12일 보성의천동에 유진하면서 인규홍의소에 통보 합의해 석산에서 합진, 각지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일거에 일본군을 섬멸할작전을 세우던중 불의의 의병 해산조칙이 내렸다.
이 조칙이 물론 일제의 강압과 매국노의 소행인줄 알면서도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비통함을 참지못하면서도 의병을 해산하고 능주의 풍재바위굴 속에서 강무경과 신병을 치료하던중 8월26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9월2일 광주로 이감 되었으나 “내가 옥중에서 죽는다마는 죄가있어 죽는게 아니라 일제의 강압에 의해 죽는다”했다. 이렇게 심의병장은 39세를 일기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은 병영성과 수인산성의 호국 현장은 매섭게 몰아치는 칼바람속에 무너져내린 성벽만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항일원혼들의 절규를 들려주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