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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리랑

[新아리랑]‘그늘진 역사’ 유산 관광코스로 재탄생

[新아리랑]‘그늘진 역사’ 유산 관광코스로 재탄생
['경술국치 100주년'기획] 新아리랑
<제2부> 경제주권운동 (7) 목포의 근대문화유산


입력날짜 : 2010. 06.30. 00:00

오거리에서 바라본 옛 조계지
목포 오거리에서 바라본 옛 조계지. 이곳은 일제시대 가장 번화한 거리로 은행과 쇼핑가, 다방 등이 즐비해 신문물이 유입되는 창구였다. 지금도 호남은행(현 목포문화원)-화신백화점(김영자 화실), 갑자옥(현 모자점) 등 당시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옛 개항장 일대 5개의 관광 루트 개발 추진
고은시인-법정스님 첫 만남 정혜원 그대로
최근 교도소장 관사·감시초소 철거 아쉬움


유명한 역사학자 E.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역사의 문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목포 원도심이다. 원도심은 1897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인의 주무대가 되었던 옛 조계지 일대로 한 많은 일제 36년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원도심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 우리민족의 삶의 방식대로 개발되고 현대화하는 과정을 거쳐왔지만 아직도 상당부분 당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이를 놓고 일부에선 일제잔재라며 청산을 부르짖기도 하고, 일부에선 수치의 흔적도 역사라며 보존해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평가와 해석이 엇갈리면서도 목포 원도심이 한일합방 100년을 맞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다. 그 변화의 방향은 원도심을 역사문화자원으로 개발해 도시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하는데 모아지고 있다.
이에 취재팀은 조대형 해설사(전남도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로 옛 조계지 일대에 산재한 일제시대 유산을 더듬어 보고 도시발전 전략의 가능성을 살펴본다.
취재팀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목포시청에서 가까운 옛 교도소장 관사. 3개월전 처음 이곳에 들렀을 때 건너편 교도소 부지에는 오래전 일신아파트가 들어서 자취가 사라졌고 관사만 세월의 이끼를 뒤집어쓴 채 민가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교도소장 관사와 감시초소가 몇 개월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엔 교회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문화재적 가치가 있지만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고 사유지여서 교회측에 매각돼 교회신축을 위해 관사와 감시초소가 철거된 것이다.
문화재와 사유재산권이 충돌할 경우 대부분 문화재가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허탈한 심정으로 오거리 본정(혼마치)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일제시대 가장 번화한 거리로 은행과 쇼핑가, 다방 등이 즐비해 신문물이 유입되는 창구였다. 지금도 호남은행(현 목포문화원)-화신백화점(김영자 화실), 갑자옥(현 모자점) 등 당시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금동 주택가
온금동 아리랑고개에서 내려다 본 주택가 풍경.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기슭에 옛 어부의 집과 공장사택들이 옹기종기 달동네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해방후 이곳은 하당 신도심이 개발되기전까지 중심상권으로서 탄탄한 기반을 다져왔다. 은행과 쇼핑가, 병원, 농기계판매소 등이 밀집해 서남권 상거래의 일번지로서 손색이 없었다. 특히 이곳에는 술집과 다방 등 유흥가가 구색을 갖춰 60,70년대 최하림, 김현 등 걸출한 문인들이 교유하며 문학과 예술담론을 꽃피우던 예향목포의 자양분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조 해설사는 “옛 개항장인 이곳은 바둑판모양으로 도로구획이 돼 있는데 특히 바닷가와 인접한 부분에선 안쪽으로 접혀져 있어 해풍이 직접 불어오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목포시는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지난 2002년 수립한 ‘목포역사문화타운 조성 기본계획’을 바탕으로 5개의 관광루트를 개발중에 있다. 일본인이 거주했던 만호진일대를 개항장길로, 조선인 마을의 중심이었던 지금의 북교동 일대를 쌍교촌길로, 일본인 마을과 조선인마을을 연결해주는 오거리일대를 신파의길, 유달산길로 설정해 대표적인 역사체험공간으로 관광상품화한다는 구상이다.
또한 올해안으로 용역결과가 나오면 이를 토대로 각종 문화관광 및 원도심재생 정책사업과 연계될 수 있는 단위사업을 발굴해 단계별 사업계획을 마련할 방침이다.
오거리를 둘러본 후 일제시대 향락문화의 상징이었던 앵정(사쿠라마치)으로 향했다. 학자들마다 견해가 분분하지만 개항장은 기능에 따라 크게 3개의 블록으로 구분된다. 상권의 중심거리인 본정(혼마치), 공장지대인 중정(나까마치), 그리고 환락가인 앵정(사쿠라마치)이 그것이다.
유곽거리
일제시대 향락문화의 상징이었던 앵정(사쿠라마치). 지금은 당시의 유곽건물 3채가 남아있을 뿐 여느 주택가와 다름없이 한적한 동네풍경을 이루고 있다.
유달산의 한 지류인 일명 ‘러시아산’ 아래 눌러앉은 유곽들은 술과 기생, 가무가 어우러져 밤마다 사쿠라꽃같은 웃음이 피어나는 밤문화의 현장이었다.
홍성철이 쓴 ‘유곽의 역사’에 따르면 “1930년대 금화동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유곽으론 주길정, 현해루, 만직지루, 삼교루 등이 있었고,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곽으로는 일출정, 명월루, 영춘정 등이 있었다. 1936년 목포에는 요릿집이 12개소, 음식점이 336개소, 카페가 20개소, 청루가 7개소였는데, 이들 업소에 수용된 도색노예는 모두 425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조 해설사는 “유곽건물은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30여개의 방이 꾸며져 있고, 마당에는 분수가 설치돼 분위기를 돋웠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당시 유곽건물 3채가 남아있을뿐 여느 주택가와 다름없이 한적한 동네풍경을 이루고 있다.
다시 발길을 온금동(다순구미)으로 향했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기슭에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옛 조선내화 공장건물이 째보선창으로부터 산비탈쪽으로 길게 뻗어있다. 주물공장은 지붕이 내려앉은 채 굴뚝만 우뚝 솟아있다. 목포시는 현재 공장부지를 비롯 주택 1천500가구를 철거하고 이 일대를 재정비하는 ‘서산·온금지구 재정비지구 지정 및 촉진계획’용역을 진행중이다. 또 연말께 용역결과가 납품되면 이를 바탕으로 주민동의를 거쳐 세부적인 사업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한다.
조선내화 공장 뒷편 주택들은 공장직원의 사택이거나 어부들의 살림집이었다. 그래서 다순구미 마을의 아이들은 동갑내기가 많고, 제삿날이 같은날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마을 남정네들이 휴어기(休漁期)에 집에 머물며 아이를 잉태하고, 출어중에 한꺼번에 사고를 당하는 경우 때문이다.
‘조금새끼’란 말은 바로 휴어기때 낳은 아이를 말한다. 이처럼 목포는 어느 곳에나 서민들의 애환이 구절구절 녹아 흐르고 있다. 아리랑고갯길을 넘어 이훈동정원을 지나 다시 시내쪽으로 향하니 정혜원이 유달산 오르막길에 자리하고 있다. 기와지붕이 가파르게 솟은 일본식 법당건물과 요사채가 고작인 아담한 사찰이다. 정혜원은 일제 강점기 창건돼 불교 포교활동의 거점역할을 할 뿐 아니라 해방후 목포 유명인사들의 교류장소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인 고은 시인과 불교정신을 섬세한 언어로 풀어낸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과의 첫 만남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당시 승려였던 고은시인이 한국전쟁이 끝난 후 정혜원으로 포교를 나왔다가 전남대 상대생이던 재철(법정스님 속명)을 만나 출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고 시인은 재철학생을 ‘현대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도록 도왔으며 효봉스님에게까지 소개했다고 한다.
동본원사 별원
목포에 도입된 최초의 일본 불교인 동본원사는 1930년대 지어진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일제패망후 목포중앙교회건물로 사용되었으며, 2007년 목포시가 매입해 전시공간(오거리문화센터)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혜원을 나와 다시 오거리로 시선을 돌리니 동본원사(목포별원)가 나온다.
동본원사는 목포에 세워진 최초의 일본식 불교사원으로 1898년 4월에 일본영사관 부지에 임시로 포교소를 설치하고 포교에 착수했다.
그러나 초기 목포거류지에서 포교활동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거류민 자제의 교육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무안동에 자리한 동본원사는 1930년대 지어진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일제패망후 목포중앙교회건물로 사용되었으며, 2007년 목포시가 매입해 전시공간(오거리문화센터)으로 이용되고 있다.
해방된 지 65년, 항구도시 목포는 일제 호남수탈의 창구로서 영욕을 간직한 채 역사의 유산들을 걸머지고 있다. 그리고 그 유산들이 새롭게 재해석되고 도시발전의 요소로 자리매김되고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고장의 역사·문화 알리는 기쁨 크다”
조대형 문화관광해설사

“외지방문객들이 우리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돌아갈 때 많은 보람을 느낍니다”.
본지 취재팀을 안내한 조대형 전남도 문화관광해설사(58)는 목포의 참모습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하루 3-4시간씩 공부해도 모자랄 정도로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관광객들의 수준이 높아져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만족스런 해설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
오랜 회사생활을 마치고 개인택시를 운행하면서 틈틈이 해설사로 참여하고 있는 조씨는 판소리 한소절을 구성지게 구연할 정도로 예능에 소질을 보이고 있다.
또 일본관광객이 많아 기초적인 일본어 회화정도는 구사한다고 소개했다.
목포에서 활동하는 문화해설사는 10여명. 이들은 시티투어, 일반투어, 지정근무 3가지 형태로 나눠지는데 지정근무는 유달산과 박물관에 파견돼 근무한다.
조 해설사는 “일본관광객에 옛 동양척식회사에 관해 해설할 때 곤혹스럽고 자존심도 상한다”며 “다시는 아픈 민족사가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