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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날의 풍경

나의 양동초딩 시절

나의 양동초딩 시절



나는 광주 남구 서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내가 태어난지 몇 년후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계시는 광산군 비아면 쌍암리(현재 첨단단지) 본가로 합류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집은 과수원이었다. 과수원안에는 감나무 90여그루, 복숭아 70여그루, 그리고 밭이 얼마쯤 자리하고 있었다. 시골생활, 특히 과수원은 나에게 자연에 대한 교감을 통해 정서적 감각을 일깨워주었고 자연의 언어를 배우게 했다. 이는 나의 시 창작에 많은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나는 비아 면소재지에 위치한 비아초등학교를 4학년초까지 다니다 가족이 광주 양동으로 이사오면서 양동초교로 전학했다.

나는 4-4반에 배정되었다. 교실은 본관 우측 운동장가에 자리하고 있었고 2층정도로 생각된다. 시골학교는 일제시대에 지어진 단층 목조건물인데 반해, 이곳 건물은 현대식 다층건물이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담임선생님 성함은 기억이 나지않지만 짧은 스포츠머리에 근육이 단련된 체격의 소유자이셨다.

시골학교와 환경이 너무 다른 때문인지 4학년때 추억은 별로 없고 콩나물교실에 정신이 하나도 없이 보낸 것같다. 단편적인 기억으로는 우리학교 배구팀이 광주공원옆 실내체육관에서 수창국민학교와 경기를 했는데 3대0으로 졌던 기억이 난다.

등굣길에 학교앞에는 상인들이 리어카에 여러 가지 군것질 거리를 내놓고 팔았다. 칡뿌리에서부터 찐고구마, 띠기, 장난감모양의 엿 등등.

5학년땐 5반이었다. 선생님이름은 허00 선생님으로 기억된다. 나이가 조금 드셨고 학년주임이어서 맨 앞줄에 앉은 덕분에 내가 간혹 다른 교실 심부름을 다녔다.

6학년땐 3반이었다. 선생님 성함은 진00이셨다. 대단히 선구적이었고 욕심도 많으셨다. 그 당시 우리반 친구로는 박남기(현 광주교대 총장)를 비롯해서 2-3명이 기억나지만 남기 외에는 연락이 되거나 근황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등굣길에 교문에서 교모나 주간행사 불조심 표어 등을 착용하지 않으면 들여보내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카드섹션에 동원돼 학교 운동장에서 몇주간 연습을 했던 생각이 난다. 그때가 내가 들었던 카드는 파흰노힌힌초빨이었다. 가을철 공설운동장에서 시내 초등학교가 모여 종합체육대회를 하면서 학교응원을 카드섹션으로 한 것이다.

봄소풍은 지금의 상록회관으로 갔다. 당시는 농촌진흥원 수목원이 있었고 벚꽃이 아름다웠다. 가을 소풍은 증심사로 갔다. 그 당시 증심사는 꽤 크고 원형보전이 잘돼 있었다. 대웅전은 아니고 어느 건물안에선가 석고로 만들어진 수많은 불상의 석고냄새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어떤 아이들은 담밑으로 흐르는 개울에서 가재를 잡는 장면이 떠오른다.

학교생활의 추억보다는 동네 아이들과 구슬땀을 흘리며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많다.

신광이발관을 중심으로 아이들은 자연스레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해 해가 저물도록 뛰어노는게 일과였다. 다방구, 칼쌈, 축구 등등

정월대보름에는 색다른 놀이가 아이들을 유혹한다. 불깡통돌리기와 산언덕에 구멍을 파고 불을 피우는 것이다. 더러는 인근 광주천변으로 나가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불깡통을 돌리고 불을 피우며 우리들의 축제를 즐겼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달동네, 양동은 늘상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부모가 아이들을 때리거나 부부싸움을 하거나 동네사람끼리 싸우거나 좁은 골목길은 늘 폭력과 한풀이로 고단한 삶을 달래는 것이었다.

나의 유년시절의 고향인 양동초딩시절은 따뜻한 기억보다는 신산한 기억이 더 많이 점철돼 있기도 하다.

팝송 애니멀즈의 '해뜨는 집'의 가사처럼 가난속에 애잔하고 쓸쓸함이 묻어나는, 그러면서도 늘 그리운 인생의 한 자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