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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아버지의 방

아버지의 방


어릴적 아버지는 방을 곧잘 비우셨다.
과수원 양철지붕이 태양에 이글거릴 때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 아득히 걸친 읍내 신작로에는
아버지가 탄 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사라졌다.
그러다 가끔씩 장날이면
도회지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리는
아버지를 보았다.
중절모에 코트 깃을 세운 신사모습으로
신작로를 터벅 터벅 걸어오셨다.
과수원에는 어린 복숭아 열매가 열병을 앓고
풍뎅이들이 윙윙대는 한낮
다알리아꽃이 여름의 문앞에 드리울 때
아버지의 방에선 향수냄새가 났다.
과수원을 떠나
어느 도시의 빈민촌 상하방으로 이사를 했을 때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방을 마련하셨다.
가끔씩 방과 방 사이를 오가며
우리의 훌쩍 커버린 모습에 놀라셨다.
그 후 나는 비로소 나의 방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아버지의 방을 가보지 못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병실로 나를 불렀다.
병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힘없는 목소리로
토막 토막 말씀을 이어갔다.
“이 제 집 으 로 가 자”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멀리서 아련히 사원 종소리가 들려왔다.
오뉴월 아미타불의 정원에
연꽃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신전속으로 조심스레 몸을 누이셨다.
그리고 더 이상 방을 나오지 않으셨다.
오늘도 나는 
아버지의 빈방에서

우두커니 아버지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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