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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리랑

(8) 암태도 소작쟁의

[新아리랑]지주·일제 횡포에 분연히 솟구친 민초들의 불꽃
['경술국치 100주년'기획] 新아리랑
<제2부> 경제주권운동 (8) 암태도 소작쟁의


입력날짜 : 2010. 07.20. 00:00

항쟁 기념탑 1997년 암태면 단고리 장고마을에 세워진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 높이 6.74m의 대형기념탑에는 지주와 일본관헌에 맞선 암태면민의 항쟁정신이 소설가 송기숙선생의 글로 잘 표현되어 있다.
7-8할 고율 소작료에 농민 삶 피폐
신의주까지 확산 전국운동 도화선
염전·개펄·노둣돌 체험 관광 ‘각광’

일제의 경제침탈의 주무대인 목포 개항장에 얽힌 이야기를 2회로 마무리 짓고, 1920년대 농민들의 운명을 획기적으로 바꾼 ‘암태도 소작쟁의’ 현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목포 인근 작은섬 암태도 주민들이 1년간(1923년 9월-1924년 9월) 소작료인하를 주장하며 지주와 일제 고압통치에 격렬히 항거한 항일운동이다. 이는 1920년대 대표적인 농민저항운동으로 하의도 등 서해안 인근 여러 섬으로 들불처럼 번져갔으며, 멀리는 신의주에까지 영향을 미친 전국적인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암태도 소작쟁의 사건을 소설화한 송기숙(전남대 명예교수)은 “동학농민전쟁 이래 민족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던 낡은 제도와 외세에 대한 저항의 본질이 소작쟁의로 터져나온 사건이다”고 규정했다.
이처럼 근대사의 민족자존을 드높인 암태도 소작쟁의의 숨결을 찾아 여정을 떠나본다.


광주에서 암태도 가는 길은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서 목포 나들머리에 이르러 웅장하게 솟아있는 압해대교를 이용, 압해도에 진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압해대교를 건너면 불가사리처럼 생긴 섬의 품안에 안기게 되고 30여분 도로를 달리다 보면 끝자락에 송공항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농협페리호와 대흥페리여객선 2척이 하루 14회 암태도를 오가며 승객과 차량, 물자를 운반한다. 소요시간은 대략 30분.
농협페리호를 타고 암태도 신석항에 도착하니 암태면사무소 직원 김지상(40)씨와 주민 최천산(75·전 암태노인회장)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의 안내를 받아 처음 찾은 곳은 소작쟁의를 주도한 서태석의 무덤. 기동리 야산에 잡초가 우거진 무덤옆에 ‘義士 서태석선생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나 정작 그의 유해는 2년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해갔다고 한다.
기동리 마을전경
소작인회 사무실로 이용되었던 서동오씨 생가마을 기동리 가는 길. 소작인회원들은 이곳에 수시로 모여 1년여간 지주와 일제관헌을 상대로 피눈물나는 싸움을 전개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작인회 사무실로 이용되었던 서동오씨 생가마을 기동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부터 암태도 소작쟁의의 역사적 배경과 전말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제국주의는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산미증산계획’이란 새로운 식민지 농업정책을 실시한다. 일제는 조선에서 식량증산을 강행하여 식량의 안정적인 공급로를 확보해야할 절박한 사정에 빠졌다. 산미증식계획의 결과 약간의 쌀 증산이 이루어졌으나 일본에 대한 쌀 수출량을 급격히 늘려 일본의 식량문제에만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일본의 필요에 의해 조선의 농업은 다른 작물을 균형적으로 생산하는 구조가 아니라 쌀 생산중심의 단작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농민층은 수리조합비 때문에 더욱 높은 소작료를 물게되었다. 여기에 1920년대 말기 생산물에 비해 소비가 급격히 감소하는 농업공황이 겹쳐 조선농민의 대부분은 절대빈곤의 상태에 빠져갔다.
이런 역사적 배경속에서 암태도 만석꾼 문재철과 소작농 사이의 질긴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이다. 암태도는 섬의 둘레가 110리, 여기에 3천700여 정보의 면적에는 해발 355.5m의 승봉산에 이어지는 구릉도 있었으나 그래도 개간된 논밭에서 나는 식량은 섬사람을 먹이고 남을 수량이었다.(박순동, 암태도소작쟁의)
서태석 추모비
암태도 농민항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서태석의 추모비가 암태면 기동리 한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서태석의 유해는 2008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해 가고 가묘가 보존돼 있다.
문재철은 이곳에서 3만석을 거둬들이는 최대 지주였지만 소작인들은 수확량의 7-8할을 소작료로 바치고 부족한 식량을 얻기 위해 고리로 쌀을 빌리는 악순환이 반복돼 피폐한 삶을 계속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처참한 삶을 영위하는 소작인들에게 구세주처럼 나타난 이가 박복영(당시 34세)이다. 그는 지주이면서도 상당한 배움과 의식이 깨인 인물로 독립운동에 관여하기도 하고 청년회를 조직해 마을주민 계몽에 앞장선다. 그리고 특히 서태석(1885-1943)을 앞세워 소작쟁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지휘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데 뒷바라지한 후원자로 기록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서태석을 중심으로 한 소작회원들이 7-8할의 높은 소작료에 반발, 소작료를 4할로 낮춰줄 것을 요구하며 추수를 거부하는데서 비롯된다. 이에 박복영은 중재자로서 지주 문재철을 만나 소작료 인하를 부탁하지만 완강한 거부입장에 부딪혀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그러는 사이 농민들은 식량이 떨어져 초근목피로 연명하거나 배고픔에 시달리다 일부는 지주측의 회유에 말려 소작료를 납부하고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소작회는 경찰의 위협과 지주의 협박·회유속에 불납동맹을 계속하는 한편 1924년 4월 면민대회를 열어 문재철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문씨측이 면민대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소작인을 습격하고 면민대회의 결의를 무시하자 소작회는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에 대표를 파견하여 소작문제를 호소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자 소작회는 5월22일 수곡리에 있는 문재철의 부친 송덕비를 무너뜨리고 결국 양측간 폭력사태로 비화된다.
이 폭력사태로 소작회간부 13명과 문씨측 3명이 검거되면서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된다. 400여명의 농민들은 박복영의 주도로 신정리에서 풍선(범선) 7척을 타고 목포로 나가 본격적인 투쟁활동을 벌인다. 이들은 일단 목포경찰서로 몰려가 집단농성을 하면서 구속된 소작회간부들을 풀어줄 것을 요청한다. 이어 재판소로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구속자 석방을 요구한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주요 언론에 상세히 보도돼 크게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상황이 점차 지주에 불리해지자 일제 관헌이 개입해 전남도경찰의 고가(古賀)고등과장과 박복영 사이에 합의가 이뤄진다.
합의내용은 이러했다. 1.지주 문재철과 소작인회 간의 소작료는 4할로 약정하고, 지주는 소작인회에 금 2천원을 기부한다. 2.대정(大正) 12년도(1923년) 미납소작료는 향후 3년간에 무이자로 분할상환한다. 3.구금중인 쌍방 인사에 대하여서는 9월1일 공판정에서 쌍방이 고소를 취하한다. 4.도괴(倒壞)된 비석은 소작인회의 부담으로 한다.
결국 소작인들이 지주와 일제의 횡포에 맞서 1년여 간의 긴 투쟁을 벌여 7할이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하는 쾌거를 거둠으로써 민족자존을 드높인 것이다.
그러나 소작쟁의운동을 주도한 서태석의 삶은 불행의 길로 치닫게 된다.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정신분열증을 앓아야 했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해 고향마을인 암태도에서조차 그를 따뜻하게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누이가 살고 있던 압해도의 어느 논둑길에서 벼포기를 움켜쥔 채 쓰러져 있는 비참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암태 소작쟁의가 불씨가 되어 다음 해 가을에는 임자도, 도초도, 자은도, 매화도에서 일제히 소작쟁의 사건이 일어나서 경찰대와 소작인간에 치열한 충돌이 벌어졌다.
승용차로 10여분을 달려 면소재지인 단고리에 이르니 암태도소작항쟁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다.
1997년 8월에 세워진 탑에는 송기숙 선생이 쓴 글이 눈길을 끈다. “농민투쟁 최초의 전국단위 승리였던 이 소작쟁의의 위대한 항쟁정신은 이 탑위에서 활화산으로 영원히 빛나리라”.
소작쟁의 이후 80여년이 지난 암태도는 이제는 지주도 소작인도 없는 그저 평화로운 섬일 뿐이다.
문재철의 생가가 있는 수곡리도, 소작인들이 모여 회의를 가진 중흥리 산 잔등도, 박복영의 생가가 있는 단고리도 모두 역사속의 한 페이지로 남아 그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뿐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암태면사무소 직원 김지상씨는 “암태도 주민은 1천100가구에 2천200명이며, 대부분 고령으로 어업보다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도로주변 공원에는 감척한 어선들이 조형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암태도는 주변 안좌, 팔금, 자은도와 연도교가 개통되면서 섬관광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추포해수욕장은 백사장 길이가 길고 주변에 송림이 넓게 퍼져있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게다가 섬치고는 식수가 풍부하고 염전과 개펄, 노둣돌 등 체험관광지가 많아 가족단위 휴양지로는 최적이다.

자연이 살아숨쉬는 암태도에서 80년전 농민들의 뜨거운 항일정신을 만나보는 것도 뜻깊은 일일 것같다.



“항쟁 앞장섰던 서태석씨 모습 지금까지 생생”
최천산 前 암태노인회장

“소작쟁의를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소작인들을 이끌고 항쟁에 앞장섰던 서태석씨의 생전모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취재팀을 안내한 최천산 전 암태노인회장은 “서태석씨는 키가 9척장신으로 거구였으며, 감옥에서 당한 모진고문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회고했다.
일제가 혼(정신)을 빼버려 감옥에서 풀려난 후 맨발로 길거리를 돌아다는 등 고문후유증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최 전 회장은 암태도가 최초의 소작쟁의 발생지이면서도 기념탑 외에는 이렇다할 유적이 없어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이를 홍보할 방법이 막막하다며 기념관 건립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난 1999년에 폐교한 암태동초교 부지에 기념관을 건립할 것을 2년전 신안군에 건의했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며 답답해 했다.
한편, 초등학교 3학년때 해방을 맞이한 최 전 회장은 학교뒷편에 방공호가 구축돼 미군 폭격기가 기습해오면 전교생이 정신없이 피신했으며, 면사소옆에 신사가 설치돼 참배를 강요당했다고 일제시대 기억을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