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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골목길의 재발견

골목길의 재발견
박준수 경영사업국장 겸 이사

사람냄새뿐 아니라 전원 향기 물씬

달동네의 상징에서 문화공간으로


입력날짜 : 2014. 11.03. 20:42

 

가을이 깊어가는 요즘 동네 골목길을 걸으며 힐링을 맛본다. 지난 일요일에도 푸른길도서관(광주 남구 주월동)을 오가면서 평소 이용하는 푸른길을 경유하지 않고 일부러 골목길을 걸어보았다.

푸른길도서관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4블럭 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단지 앞 푸른길을 따라 15분정도 걸어가면 도착한다. 푸른길은 옛 경전선이 놓인 자리에 숲을 조성해 시민들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게 만든 오솔길이다. 여름 내내 무성하던 녹음이 어느새 울긋불긋 단풍 옷으로 바꿔입고 지나는 행인을 가을의 낭만 속으로 초대한다.

이런 매력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산책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 길을 보행로로 애용한다.

그러다보니 집 주위의 다른 골목길을 걸어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간혹 푸른길 주변 선술집에 술을 마시러 가는 길에 골목길을 지나가는 경우가 있으나 도로와 인접한 부분만 훑어보는 정도이고, 주택가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 보는 경우는 드물다. 필자가 사는 남구 진월동, 주월동 일대는 금당산을 배경으로 단독주택이 밀집해 골목길이 미로를 형성하고 있다. 이 곳으로 이사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승용차로 스치듯 지나갈 뿐 차분히 걸어본 적이 거의 없다.

이렇게 푸른길만 걷다보니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어 안쪽 골목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단독주택이 모여있는 골목길은 아파트에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우선 집모양이 성냥갑처럼 비슷하면서도 제각각 개성을 지니고 있어 흥미롭다. 대문색깔, 정원의 크기, 건물구조, 유리창과 마감재의 차이 등 저마다 꾸며진 상태를 보노라면 주택전시장을 둘러보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한적해서 좋다. 차량통행도,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어 긴장을 풀고 어슬렁 어슬렁 걷는 묘미가 있다. 골목길 곳곳에 다양한 맛집들이 얼굴을 내민다. 길 양편에 오래된 식당과 최근 개업한 식당들이 뒤섞여 경쟁을 벌인다. 칼국수, 갈비구이, 족발집 등등 서민들의 입맛에 맞는 메뉴들이 식욕을 돋운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보기 힘든 세탁소, 방앗간, 미용실, 구멍가게 등 전통적인 골목상권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아파트의 높고 폐쇄적인 압도감 대신 낮고 개방적인 친근감이 사람사는 냄새를 물씬 풍긴다. 마당에 내걸린 빨래와 가을 꽃이 핀 화분, 심지어 개짖는 소리마저 정감있게 들린다.

그런데 지난 여름 푸른길도서관을 가다가 불쑥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어느 집앞 화단에 심어진 포도나무였다. 포도넝쿨 아래 청포도가 주렁주렁 열린 채 유월의 뜨거운 햇볕을 쬐고 있었다. 도심 길가에서 마주친 포도넝쿨은 신기하면서도 뭔지 모를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무성한 잎 사이로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삭막한 도시에서 전원의 평화로움을 맛보게 한다.

골목길은 사람냄새뿐 아니라 전원의 향수가 숨쉬고 있음을 발견한 기분 좋은 하루였다.

최근 달동네의 상징인 골목길이 도시재생의 바람을 타고 새롭게 탈바꿈하고 있다. 골목길은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주택가의 보편적인 보행공간이었으나 80년대 말부터 불어온 고층아파트 붐으로 인해 사라지기 시작해 지금은 도시 한켠에 소외의 그늘 속에 감춰져 있다.

신도심은 물론 종전 단독주택들이 폭넓게 분포되었던 구도심마저 재개발 정책으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골목길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도로와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노령화 사회로의 진입과 1인가구의 증가, 도시재생에 대한 정책적 관심 증대 등으로 골목길에 변화가 일고 있다.

그동안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면서 헐값이었던 단독주택이 환경개선과 보안시스템 발전으로 취약점이 보완돼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시는 올해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선도지역 공모 사업에 원도심인 동구 충장동, 동명동, 산수동, 지산동 일원을 대상으로 한 근린재생형 ‘새롭게, 낯익게, 깨비동 문화동구’ 사업이 선정돼 4년간에 걸쳐 200억원 규모로 추진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연계돼 도시재생의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 사업의 성과를 바탕으로 골목길로 상징되는 원도심이 쾌적하면서도 문화적 향기가 넘쳐나는 색깔있는 생활공간으로 탈바꿈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