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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박씨종친회 ‘박영규·해룡산성 재조명’ 학술대회

“순천 해룡산성 역사적 가치 기대 이상”
순천박씨종친회 ‘박영규·해룡산성 재조명’ 학술대회
후삼국-고려 초기 해상세력 연구 귀중한 유적
박영규 사후 산신추앙 웅거지 문화재지정 시급


입력날짜 : 2016. 04.04. 19:09

고려 개국 공신 박영규와 순천 해룡산성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최근 순천대에서 명창환 순천시부시장, 김병권 순천시의회 의장 등 2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순천박씨종친회 제공

고려개국 공신 박영규 웅거지로 추정되는 순천 해룡산성이 고대 전남 동부권 향토사 연구의 중요한 유적으로 밝혀져 학계와 순천시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순천대에서 열린 ‘삼중대광공 박영규와 순천 해룡산성 재조명 학술대회’에는 명창환 순천시부시장, 김병권 순천시의회 의장, 순천박씨중앙종친회 회원 등 2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주제발표와 종합토론이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박영규는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걸쳐 순천지역에서 활동한 호족으로 후백제 견훤의 사위였으며, 왕건을 도와 고려건국에 공을 세웠고 사후에 해룡산신이 됐다는 역사기록이 있다. 그동안 박영규에 대한 연구는 호족출신에 초점을 맞춰 정치·사회적 논의에 집중돼온 반면 활동거점이었던 해룡산성에 대한 고증과 해석은 빈약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박영규가 웅거한 것으로 추정되는 순천시 홍내동에 위치한 해룡산성의 지정학적 특성과 사후에 봉안된 해룡산사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는 데 모아져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해룡산은 순천만 안쪽 순천시 홍내동과 오천동 일대에 자리한 해발 75m의 낮은 야산이다. 현재 모습은 일부 숲이 남아 있고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돼 있으나, 과거에는 토성이 있었고 산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포구역할을 했다.

최인선 순천대 교수는 ‘해룡산성의 축성과 호족 박영규’ 주제발표에서 해룡산성은 둘레가 2천85m에 이르는 대규모 토성으로 2002년 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 중기 이후 시기 기와, 토기, 자기류 등이 다수 출토됐으며, 특히 기와에서 ‘좌관초(左官草)’, ‘우관초(右官草)’ 등 명문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 해룡산에 세곡창이 있었고 성곽내부에 고려청자편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까지 그 지역의 치소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최 교수는 또한 박영규와 관련해 ‘승평지’, ‘강남악부’ 등 역사서에 “박영규가 해룡산 아래 홍안동에 웅거하였고 죽어서 해룡산신이 됐다”는 기록을 볼 때 순천 일대를 지배하는 세력가였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박영규는 순천만을 비롯한 여수, 광양지역 일대 해상세력을 장악하면서 많은 부를 축적했을 것으로 보았다.

이경엽 목포대 교수는 ‘순천 해룡산사와 역사적 인물의 신격화’ 주제발표에서 박영규를 해룡산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낸 해룡산사의 역사적 성격을 제의의 관점에서 부각시켰다. 그는 지역민을 결집하고 지방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신사가 건립되는데 10세기 중반 이후 약화된 순천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해룡산사가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고려 현종은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나주를 목(牧)으로 격상시킨 반면 순천을 목에서 군현으로 강등시키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는 분석이다. 특이한 점은 조선 전기 국가의 사전제도를 정비하면서 지방의 제의 역시 손질했는데 해룡산사는 없어지지 않고 존속하다가 18세기 중엽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산신신앙과 성황신앙이 지역민들을 결집시키고 지방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수단으로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해룡산사는 고대 산신신앙의 전통과 연결돼 있고 순천지역의 역사와 민속, 그리고 조선후기 향토사와 접맥돼 있어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박영헌 순천박씨중앙종친회 회장은 “시조 박영규의 역사적 의미에 걸맞게 하루 속히 해룡산성과 사우가 복원돼 국가문화재로 지정되기를 고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