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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리랑

(9) 문학과 항일운동

[新아리랑]주옥같은 시어에 오롯이 살아숨쉬는 ‘민족혼’
['경술국치 100주년'기획] 新아리랑<제2부> 경제주권운동 (9) 문학과 항일운동


입력날짜 : 2010. 08.03. 00:00

‘뽕나무집’으로 불리는 조운의 생가
영광읍 도동리 136, 일명 ‘뽕나무집’으로 불리는 기와집이 조운의 생가이다. 제법 터가 넓은 그의 생가는 작품에 등장하는 달맞이방이 보이고 정원에 석류나무와 사철나무가 꿋꿋하게 서있어 그의 감성을 느껴볼 수 있다.
조운·김영랑·김현승 등 민중계몽 ‘앞장’
3.1운동 참가, 신사참배·창씨개명 거부
‘남의 언어로 글 쓸 수 없다’ 절필 선언도

일제치하 경제주권 운동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문화예술을 통한 항일운동이다. 나라를 잃은 지식인들은 고뇌는 깊었지만 식민체제의 억압적 현실앞에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문학이나 미술 등 예술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고 때론 암울한 처지를 표출하거나 민중계몽에 앞장서는 등 존재를 드러냈다. 특히 1919년 3.1운동은 신문물을 접한 지식인들이 조국에 대한 각성을 새롭게 하고 강고한 식민체제를 깨트리기 위한 거국적 저항운동에 참여하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이를 계기로 예술 전반에 본격적인 항일운동이 번져갔다.


광주·전남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3.1운동 대열에 가담하고 뜨거운 조국애의 열정을 펜이나 붓을 통해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운을 비롯 김영랑, 박용철, 김현승 등이 꼽힌다. 일각에선 친일의 관점에서 당시 지식인들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시도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이러한 쟁점은 뒤로 하고 항일 행적만을 다루기로 한다.
먼저 사회계몽운동에 힘쓰고 현대시조의 선구자로서 문학사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조운(1900-?)을 만나러 영광으로 향한다. 영광읍 도동리 136, 일명 ‘뽕나무집’으로 불리는 기와집이 조운의 생가이다. 제법 터가 넓은 그의 생가는 작품에 등장하는 달맞이방이 보이고 정원에 석류나무와 사철나무가 꿋꿋하게 서있어 그의 감성을 느껴볼 수 있다.
일설에 따르면 조운은 1947년 월북하기전 이 집을 조흥은행에 담보하고 노환으로 눈이 먼 어머니를 업고 나가다 안되겠다 싶어 홀로 남겨두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텅빈 생가는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잡초만 무성한 채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생가 입구에 ‘파초’ 시비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펴이어도/펴이어도 다 못 펴고/ 남은 뜻은// 고국이 그리워서냐/ 노상 맘은 감기이고// 바듯이 펴인 잎은/ 갈갈이/이내 찌어만지고”(‘파초’ 전문)
생가에서 15분쯤 걸어가면 노인봉 아래 영광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향교 명륜당이 바로 식민지시대 영광중학원이 있던 곳. 조운은 1919년 영광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한 후 고경진, 노준 등과 함께 만주로 피신했다가 일본경찰에 붙들려 영광으로 이송돼 풀려난 후 영광중학원이 문을 열자 작문교사로 재직한다.
만주피신 시절 그는 광막한 대륙을 떠돌다 소설가 최서해를 만나 교유하면서 신문학과 현대문학의 과도기에서 번잡한 문장과 서투른 모더니즘 색채로 우중충한 국내 문단풍토와는 다른 간결 정확한 그의 문장형식에 매료된다. 나중에 최서해는 조운의 여동생과 결혼, 매제지간이 된다.
영광중학원 시절 조운은 동료교사인 박화성에게 소설을 쓸 것을 권유, ‘추석전야’를 춘원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추천한다.
무슨 연유였는지 불문명하지만 조운은 영광중학원을 그만 두고 시조창작과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해 ‘독서회’와 ‘추인회’ 등을 주도해 군민들의 계몽에 앞장섰고 1934년 조직된 ‘체육단’ 산하 ‘갑술구락부’에서 문학강연 소인극회 등 문화활동을 적극 펼쳤다. 그러나 그해 9월 일제가 조작한 영광삐라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1년10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 조선식량영단 영광출장소 서무계장으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는다.
조운은 건준활동에 참가, 강연을 다니며 군민들을 일깨우는데 앞장섰지만 김구선생의 협상실패에 깊은 좌절감을 맛본다. 이 무렵 문단의 조파인 ‘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47년 73편이 담긴 ‘조운시조집’을 내고는 49년 가족과 함께 훌쩍 북으로 떠났다.
1988년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 이후 문학사적 위치가 재조명되어 1990년 9월에 유족과 영광지역 예술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운문학전집’을 출간했으며, 2000년 7월에는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주관해 ‘조운시조집’을 복간했다.
또한 2000년 탄생일에 맞추어 영광에 시비제막식을 갖기로 했으나 훼손되는 우역곡절끝에 2000년 9월 제막식을 가졌다.
김현승이 성장기 보낸 양림교회
김현승의 부친 김창국 목사가 시무했던 양림교회. 다형은 이곳에서 성장기를 보내면서 기독교적 세계관과 문학적 감성을 배양한다.
취재팀은 이어 1930년대 시문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식민치하 우리민족에게 주옥같은 서정시를 선사한 영랑 김윤식(1903-1950)의 고향을 찾았다. 강진읍 남성리 211-1 영랑의 생가(기념물 제89호)가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기역자 모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배치돼 있으며, 안채 큰방엔 밀납인형이 영랑을 대신해 시상에 젖어있다. 영랑은 500석 부농의 집안에 엄격한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밑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현재 강진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서울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하고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는데 이때부터 신문학에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구두속에 독립선언문을 감추고 향리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모의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교도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주민 김모씨(56)는 “당시 영랑이 생가 뒤 대숲에서 일경의 눈을 피해 만세운동 삐라를 찍었다는 얘기를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출옥후 영랑은 고향집에서 문학에 뜻이 있는 인사들과 함께 ‘청구’라는 동인지를 내며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영랑은 휘문의숙을 중퇴한 후 1920년 중국 상해로 가려다 실패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서 청산학원 중학부에 편입해 성악을 공부하려 했다.
그러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2년 영문과로 전과했다. 그러나 1923년 11월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여름방학에 귀국해 있다가 일본으로 가지 않고 학업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청산학원 시절 친교를 맺은 이가 바로 용아 박용철이다. 용아는 영랑에게 시창작활동을 계속할 것을 권유했으며, 영랑의 시적 재능을 발견해 훗날 문학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영랑과 용아가 일본에서 돌아온 후 더욱 깊은 사이가 된 것은
조운과 김현승 시비
조운의 대표작 ‘석류’ 시비(왼쪽). 2000년 탄생일에 맞추어 영광에 제막식을 갖기로 했으나 훼손되는 우역곡절끝에 그해 9월 제막식을 가졌다.
1930년 3월5일 ‘시문학’을 창간하면서부터였다.
영랑의 시세계는 일제치하에서 설움받는 민족의 한과 강한 저항의식 그리고 고향사랑이 섬세하면서도 때론 강렬한 언어로 표출되었다.
특히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일제의 압박속에서 대부분의 시인들이 지나치게 설움에 짓눌려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영랑의 시 세계는 그런 설움을 딛고 견디는 비장함이 바탕에 깔려 있다. 손광은 전남대명예교수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싯귀중 ‘나는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에서의 ‘봄’은 조국해방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일제시대 망국의 한이 범람하던 시절, 감상과 애상의 정조를 극복하고 ‘감성적 지성의 세계’를 개척한 다형 김현승도 항일문학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다형 김현승(1913-1975)은 1913년 부친 김창국목사와 모친 양응도 사이의 6남매중 둘째로 평양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부친이 광주로 옮겨오면서 양림동에서 성장기를 보낸다. 1932년 숭실전문 문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에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 1934년 5월25일자 동아일보 문화란에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등 2편이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호남신학대에 세워진 다형 김현승 시비. 다형은 유년의 추억이 어린 양림동에 지내면서 광주문인들과 손수 끓인 커피를 마시면서 문학을 논했다.
다형은 1937년 부친이 교역자로 있던 교회청년단체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반국가집단으로 낙인찍혀 그와 부친, 누이까지 사상범으로 체포돼 고문을 받고 투옥까지 당한다. 곧이어 다형은 벌금형을 받고 풀려나왔으나 관의 압력에 의해 교사직을 사퇴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김현승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거부는 물론 일본어로 작품을 쓸 수 없다며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붓을 꺾고 만다.
해방이 되자 호남신문사의 기자로 일하다가 곧 그만두고 46년 6월 숭일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한다. 이어 1951년 조선대 문리대교수로 자리를 옮겨 재직하면서 문예지 ‘신문학’의 편집을 맡아 지역문학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손광은 교수는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작품들이 ‘신문학’에 실렸다”면서 그만큼 그의 문단의 위치가 높았음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엄혹한 일제치하에서 지식인이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시대에 영합했던 친일문학은 청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반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의로운 고장 지식인이자, 진정한 선비”
손광은 전남대 명예교수

“일제치하의 호남지역 시인들은 의(義)로운 고장 지식인답게 항일의식을 바탕에 깔고 시를 썼습니다”.
다형 김현승의 추천으로 등단한 손광은 전남대명예교수(76)는 일제의 엄혹한 통치속에 자유롭게 사상을 표현할 수 없는 시대환경이었지만 주옥같은 시의 문맥에는 민족혼이 오롯이 서려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예로 들면서 ‘나는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에서의 ‘봄’은 조국해방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 용아 박용철의 대표시 ‘떠나가는 배’ 역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만주로 떠나는 독립투사의 결연한 심정을 읊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특히 김현승의 경우 일본어로 작품을 쓸 수 없다며 목숨과도 같은 붓을 꺾는 불굴의 저항의지를 보였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민족의 삶과 감정을 어떻게 남의 나라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냐며 시대에 영합했던 친일문학은 청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끝까지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조국사랑을 불태운 한용운, 윤동주, 이상화, 이병기 등 시인이야말로 언행을 일치시킨 진정한 선비라고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