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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화순과 나

화순과 나

박준수 광주매일신문 편집국장
 
필자에게 있어 화순은 유년의 추억이 고즈넉이 숨쉬는 곳이어서 감회가 새롭다. 본적지가 화순 도곡이기도 하거니와 큰 고모님댁이 화순 도곡 천암리이고, 외갓집이 화순 이양 도림이어서 초등학생 시절 방학때면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자주 찾은 적이 있다.
60-70년대 화순은 여느 농촌과 다름없이 산좋고 물맑은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누구나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기차 차창너머로 바라보는 시골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비록 짧은 일정이지만 외가집과 고모님댁에서 경험한 시골생활은 도회지에서 살아온 필자에게는 퍽이나 흥미로웠다. 동네 아이들과 토끼몰이도 하고 냇가에서 목욕도하는 즐거움은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그렇게 유년의 기억 한켠을 차지하는 화순은 성인이 되어서도 고향마을처럼 푸근한 느낌으로 채워지고 있다. 대학생 시절 심하게 정신적 방황을 겪을 때는 문득 광주역에서 경전선 완행열차를 타고 화순 능주까지 여행하곤 했다. 아마도 유년의 순수한 경험들이 자기장처럼 나를 끌어당긴 것 같다.
특히 문학에 심취해 있던 나는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를 자주 찾곤 했다. 추수가 끝난 늦가을 군내버스를 타고 중장터를 넘어가는 길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한폭의 동양화처럼 운치가 가득했다.
여기에 당시에 쓴 시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ꡒ육자배기 가락이 눈덮힌 도암 산굽이를 휘돈다/ 등 얇은 민중불 서넛 겨울 山門에서 떨고 있다/ 천불천탑 쌓은 후 천년 세월이 더 흘렀건만/ 부처님 아직 화엄의 꿈에서 깨어나지 않네....(이하생략)ꡓ.
이후에도 나는 종종 가족들과 함께 기이한 운주사의 불상과 탑을 만나러 화순 땅을 밟는다.
내가 화순과 더욱 끈끈한 인연을 맺은 것은 춘양에 어머니를 모신 때문이다. 20년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춘양 양지바른 언덕에 모신 이후 틈틈이 산소를 찾아 못다한 효도를 마음으로나마 대신하고 있다.
이처럼 필자와 정신적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는 화순이 최근 날로 새로워지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기 그지없다. 우선 광주와 근접한 지리적 장점을 살려 베드타운으로서의 도시기능을 확장해가고 있어 도농복합형 발전전략을 추진하는 것이 돋보인다.
특히 화순전남대병원 유치를 계기로 첨단 의료타운으로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성장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아울러 녹십자 등이 입주한 생물산업단지 조성은 농가 고소득과 고용창출에 든든한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른 농촌지역이 인구감소로 애를 태우고 있는 가운데 화순은 여러 가지 인구유입 요소가 늘어나고 있어 다행스럽다.
화순은 불과 몇 년전만 하더라도 농업 이외에 화순탄광과 농공단지를 중심으로 하는 2차산업이 고작이었으나 점차 첨단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바람직한 산업구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다 최근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모으기 위한 다양한 시책들이 추진되고 유럽 농촌과 같은 선진국형 모델에 한발짝 다가서는 양상이다.
화순은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아도 곳곳에 유명한 관광명소가 즐비하다. 동복 적벽은 댐 건설로 반쯤 물에 잠긴 상태이지만 여전히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중국 적벽과 비유되는 이곳은 그동안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탐방하며 풍류를 즐긴 곳으로 유명하다. 옛 흔적을 말해주듯 지금도 주변에는 정자들이 산재해 있다. 또한 국보로 지정된 철감선사 탑비와 목조탑 양식의 대웅전으로 유명한 이양 쌍봉사, 구한말 의병들의 구국혼이 살아숨쉬는 쌍산의소, 고인돌공원 등 유구한 문화재와 역사유산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이어 최근에는 수만리를 중심으로 산림욕장과 쉼터 등이 활발하게 조성되고 있어 도시인들의 쾌적한 휴식처로서 주목받고 있다.
이밖에도 화순은 농업분야에서도 근교농업에 중점을 두고 원예작목 재배에 박차를 가해 농가 소득 향상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같은 활기찬 영농활동을 통해 앞으로 화순은 더욱 잘사는 농촌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기대한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 선비정신과 창조적 에너지가 넘치는 화순이 날로 발전하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