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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누가 시를 읽는가

▒누가 시를 읽는가

 

영혼이 깃든 시는 오랜 생명력을 갖는다

 

 

지성 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회자된 지 대략 20여 년이 흐른 것 같다. 2000년대 신자유주의 물결이 범람하면서 정신문명의 꽃이었던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은 그 효용성에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더욱이 인터넷의 급속한 발전으로 활자와 종이로부터 거리가 멀어지는 일상이 자리잡으면서 자연스레 글쓰기는 구시대 유물로 전락하는 느낌이다. 온라인 상에서 모든 일상의 문제들이 해결되다 보니 ‘문서’를 만드는 행위가 불필요해진 것이다. 게다가 디지털의 장점인 전사(복사)와 무한한 전파기능이 더해져 아프게 머리를 쓸 이유마저 없어졌다.
언어가 탄생한 이후 문학은 인류에게 풍성한 정신적 유산을 제공해왔으나 점점 그 존재가치가 희미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 환경 속에서 문학은 섬처럼 고립된 존재가 되었다.
그 이유는 독자의 부재이다. 디지털 세상에는 시집을 읽어줄 독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서점의 서가에는 수많은 시집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으나 독자들의 손길은 다가오지 않는다.
반면, 시를 생산하는 시인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문예지에서는 발행주기에 맞춰 매번 신인상을 공모한다. 그리고 상당수 문예지들이 응모작에 대해 문학성에 대한 엄격한 심사과정 없이 당선을 통보하고 시인이란 타이틀을 부여한다.
그 순간 우리가 오랫동안 경외로운 존재로 인식해온 시인이 값싼 잡지의 표지모델처럼 환멸을 선사한다.
사회 계층간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듯이 문학 역시 양극화가 빚어지고 있다. 고급스런 프로페셔널 문학과 취미 수준의 동호인 문학이 공존하면서 충돌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고령화 사회가 열리면서 대학교육을 받은 은퇴자들이 교양삼아 문단에 대거 입문해 문학작품 양산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는 문학의 내재적 가치를 희석하는 또 하나의 시대흐름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학 활동은 자유분방함을 전제로 하지만 스스로의 엄격한 내재율이 존재한다. 그 내재율이란 표현의 혁신을 의미한다. 혁신의 양상은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고 독자에게 감동을 안겨주지만 혁신이 없는 작품은 독자에게 무료함을 안겨주고 영혼을 메마르게 한다.
나는 고급문학과 교양문학의 간극과 대립을 말하고 싶지 않다. 고급문학을 찬양하고 교양문학을 낮게 평가할 이유도 없다. 나는 오로지 ‘죽은 시인의 사회’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평범한 일반인들이 은밀히 모여 시에 대한 꿈을 모락모락 피어 올리는 무대이다. 인생을 문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성찰하는 순수한 열정이 만나면 참신한 언어가 탄생할 것이란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영감이 약하다면 열정이라도 있어야 한다. 시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지난한 고쳐쓰기를 하는 작업과정이 열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저절로 독자들의 시선이 따라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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