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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초원파크

초원파크

 

 

1. 발산마을

 

광주에는 여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달동네로 불리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 중 하나가 서구 양3동 발산마을이다. 발산(鉢山)이라는 이름은 스님의 바리(공양그릇)를 엎어놓은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 광주천을 지천에 두고 드러누운 소의 잔등처럼 완만한 언덕에는 기와집과 슬라브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이곳은 1970~80년대 방직공장 여공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곳이기도 하다. 광주천 건너에 일제강점기에 가동을 시작한 방직공장이 있어 면방업이 활황이던 시절에 10대 여공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지리적으로 공장과 가깝거니와 방값이 저렴했다. 당시 집주인들은 세를 많이 놓기 위해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집집마다 여공들로 북적거렸다. 90년대 들어서 방직공장에서 기숙사를 새로 지으면서 여공들의 자취가 차츰 사라졌지만 오래된 집들은 여전히 그 당시의 가옥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발산마을은 필자의 유년시절 기억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작은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계셔서 종종 심부름을 다니느라 좁은 골목길을 누볐다. 산자락에 다닥다닥 굴딱지처럼 몸을 맞대고 있는 집들은 가난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나무대문 사이로 비치는 집안은 손바닥만한 마당에 빨래가 널려 있고 자전거나 리어카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막 도시로 올라온 이주민들이다. 그래서 안정적인 직장보다는 하루하루 품을 파는 일에 종사했다. 가까이에 있는 양동시장에서 장사를 하거나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물론 방직공장같은 생산직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머니는 양동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셨고, 작은아버지는 방직공장 내 공사현장에서 미장일을 하셨다. 이후 어머니는 대인시장으로 자리를 옮겨 조기장사를 오래도록 하셨다. 작은아버지는 양동시장복개상가 건설과 주택 등 각종 공사현장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셨다.

 

필자는 초등학교 졸업 후 집안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채 자개공장과 가구공장에서 몇 년간 일한 적이 있다. 그 때 발산마을에 있는 가구공장 한 곳에서 잠시 일한 기억이 있다.

발산마을은 분명 도시에 영토를 두고 있지만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변두리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산머리에는 과수원이 있어 봄이면 분홍빛 복사꽃이 만개하고, 밭이랑에는 장다리꽃이 노란 꽃잎을 하늘거렸다. 지금도 밭에는 묘지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 뽕뽕다리

 

발산마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뽕뽕다리이다. 공사장에서 쓰는 아나방을 엮어 만든 다리로 철판에 구멍이 뽕뽕 뚫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다리는 방직공장에서 여공들이 광주천을 건너다니기 편하도록 하기 위해 가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뽕뽕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돌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일명 독다리)를 이용해야 했다. 다리에 구멍이 뚫려있어 강물이 아득히 흐르는 모습이 보이니 여자들이나 어린애들은 무서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리를 건널 때는 떨리는 마음으로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어야 했다. 방직공장 여공들은 작업복차림으로 출퇴근을 했는데 특히 여름에는 연하늘색 치마를 입고 뽕뽕다리를 지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헌데, 짓궂은 동네총각들은 뚫린 구멍으로 여자들의 속옷을 훔쳐보기 위해 다리 밑에서 위를 쳐다보며 군침을 흘리곤 했다. 실연을 당한 방직공장 여공이 목을 매달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유년시절의 무대가 되었던 발산마을은 작은아버지가 북구 용봉동으로 이사하면서갈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필자도 10대 후반인 1977년에 공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해 발산마을은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러다가 10여년이 흐른 뒤 다시 발산을 찾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게 되자 19922월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신혼집을 이곳 발산에 마련한 것이다. 키 작은 주택들 사이로 새로 지은 초원파크라는 아파트였다. 70여호에 불과한 소규모 아파트였지만 신축건물이라서 쾌적하고 본가 및 직장과도 가까워 편리했다. 또한 아내는 전남지역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는 터여서 주말이면 올라오는데 터미널로부터 멀지 않아 좋았다. 걸어서 20분이면 충분히 터미널 대합실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결혼 후 부모님 곁을 벗어나 비로소 나의 독립된 생활공간을 갖게 되니 하루 하루가 새롭고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쉬는 날에는 아내와 함께 발산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10여 년이라는 시간동안 발산도 나름대로 변해 있었다. 달동네의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이나 군데군데 아파트가 포플러나무처럼 솟아있고 구멍가게 대신 수퍼마켓이 골목상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뽕뽕다리 역시 오래전 홍수에 떠밀려 사라졌고 시멘트 교각이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우리집 아파트는 2층이어서 전망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대가 높은 편이라 조망을 저해하는 건물들이 별로 없어서 무등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렇게 신혼의 단꿈이 무르익는 사이 아내가 큰 딸을 임신했다. 나는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3. 신혼의 단꿈

 

그런데 하느님은 기쁨만 주시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큰 슬픔이 닥쳐왔다. 농성동에 사시던 부모님께서 낡은 집을 새로 개축하기 위해 잠시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오셨다. 나는 아내와 주말부부로 지내는 상황이어서 부모님과 한 아파트에 사는 것이 좋았다. 당시 어머니는 대인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는데 택시로 출퇴근을 하셨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시장에 가시는데 아파트 뒤편 광천초등학교에서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곤했다. 그해 추석 전날 낮이었다. 어머니가 장사를 마치고 택시에서 내려 길을 건너다 시내버스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혀 쓰러지셨다. 그때 나는 회사에서 당직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부랴부랴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어머니는 가족들과 함께 병원으로 실려가셨고 현장에는 버스 타이어 스키드마크와 피묻은 자국만 남아 있었다. 주변사람으로부터 현대병원으로 이송됐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갑작스레 닥친 일이라 무섭고 떨렸으나 설마 어머니가 돌아가시지는 않겠지라며 큰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머니의 상태는 내 바람과 달리 위중한 상황이었다. 병원측은 대학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급하게 전대병원으로 옮겼으나 가망이 없다며 돌려보냈다. 어쩔 수 없이 기독병원 중환자실에 모셔다 놓고 기적처럼 회생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뇌사상태로 일주일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나에게 절망감으로 다가왔다. 아파트 뒷마당에 천막을 치고 장례를 치르면서 우리 형제들은 울고 또 울었다. 슬픔이 컸던 까닭은 어머니가 한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고작 쉰여섯에 교통사고로 육신이 부숴지는 고통으로 생을 마감하신 것이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이다.

 

4. 어머니의 죽음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가슴속에서 지우지 못한다. 그리고 가엽게 이승을 떠난 어머니의 한 많은 생애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의 묘소는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어머니 사후 5, 회갑을 맞아 추모의 시비를 세워 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추모하는 것밖에 없다.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러고 보니 발산마을은 내 삶의 변곡점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가난과 설움, 희망과 인내가 배어있는 곳이다. 지금도 간혹 초원파크가 우뚝 솟아있는 그곳을 지날 때면 파노라마처럼 희노애락의 장면이 스쳐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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