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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경전선 기차여행

경전선 기차여행(박준수 시인)


회색 들판에 푸른 기운이 돋아나고
덜컹거림과 기적소리가 마음속에 아련히





겨우내 회색빛만 가득한 아파트 베란다에 모처럼 가느다란 햇살이 거실 깊숙이 파고든 2월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문득, 봄빛 가득한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런 날에는 가까운 효천역에서 경전선 완행열차를 타고 유년시절 추억여행을 떠나는 게 제격이다.
어린 시절 외갓집은 이양면 초방리였는데 광주 집에서 외갓집에 갈 때 광주역이나 남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곤 했다. 그리고 도림이라는 작은 간이역에서 내려 장흥방향으로 시오리길을 걸어가야 했다.
어린 시절 기차여행은 지금껏 특별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레일을 달리는 철마의 모습이며 독특한 기적소리가 신기하고 호기심을 자아냈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하면 창밖 풍경은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착각에 빠져든다. 성냥갑처럼 작은 도시의 집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건널목에서 멈추어선 사람과 차들이 판화처럼 붙박혀 있다. 기차가 도시를 벗어나 농촌으로 접어들면 더욱 경이롭다. 전봇대와 나무들이 쉼 없이 왔다가 사라지는가 하면, 들판은 알록달록 풍경화를 수시로 그렸다가 지우곤 했다. 
또한 기차가 강 위에 걸쳐진 철교를 지날 때면 아찔한 물 소용돌이와 함께 쇠바퀴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심장을 조마조마하게 했다.
특히 철길은 산자락을 하염없이 지나는데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창가에 가까이 다가와 손을 흔들어주곤 했다.
이런 동화같은 추억을 떠올리며 아내와 함께 효천역으로 향했다. 2월 햇살이 순하고 보드라웠다. 플래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이 아내는 연신 셀카봉을 이용해 자신의 모습을 찍으며 들뜬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열차가 도착해 객차 안으로 들어서니 대학생 5~6명이 앉아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겨울방학을 이용해 친구들끼리 기차여행을 나선 것 같았다.
열차가 서서히 출발하자 창밖 풍경도 덩달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행열차 특유의 덜컹거림을 온몸으로 느끼며 겨울 들판 속으로 빨려들었다. 한때 간이역이었다가 사라진 앵남역을 지나 역사만 덩그러니 남겨진 남평역을 지나갔다. 남평역은 곽재구 시인이 80년대 암울한 사회현실을 막차를 기다리는 대합실 풍경으로 묘사한 시 ‘사평역에서’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화순역에서 잠시 정차한 기차는 지석강을 지나 능주역을 향한다. 느리게 흐르는 겨울 강물이 산그늘에 푸르스름한 빛을 띠면서도 유리알처럼 맑다. 능주역을 거쳐 이양역을 지나자 외갓집이 있던 도림역을 스쳐간다. 간이역이었던 도림역은 오래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기억속에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다. 기차가 산굽이를 돌아서자 산비탈의 나무들이 한층 가까이 얼굴을 내민다. 기찻길  주변은 오랜 세월동안 사람의 발길이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비밀스런 공간이 만들어졌다. 손바닥만한 논밭에서부터 웅덩이, 과수원, 무덤, 외딴집에 이르기까지 ‘난장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기차가 보성을 지나 남해안에 가까이 근접하자 회색 들판에 푸른 기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칼바람을 피하기 위해 흙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보리이파리가 어느새 키가 자라 밭이랑을 연한 풀빛으로 채색하고 있다.
기차는 득량, 예당, 조성을 지나 벌교역에 다다른다. 벌교는 철길과 바다가 맞닿는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입지 때문에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픔이 질펀하게 흐르는 땅이 벌교이다. 일제는 남해안 일대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쌀, 누에, 면화 등 이른바 ‘3백(白)’ 물산을 이곳에 집하해서 일본 본토로 실어 날랐다. 그래서 벌교는  사람과 돈이 몰려드는 상업도시로 발전해 한 동안 융성기를 보냈다. 지금도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건물들이 남아있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벌교역에서 내려 맨 먼저 태백산맥 문학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기념해 지은 태백산맥 문학관은 문학기행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동안 벌교에 올 때마다 들르곤 한 곳이지만 구경삼아 다시 한번 가보기로 했다. 읍내상가를 지나 하천다리를 건너 벌교상고를 경유해 언덕에 둥지를 틀고 있는 문학관에 다다랐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입구에 주차장이 새로 널찍하게 만들어져 한결 훤해진 느낌이 들었다. 잠시 문학관을 둘러보고 인근에 있는 소화의집, 현부자네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읍내로 나와 거시기꼬막정식집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고 태백산맥의 무대가 된 거리를 둘러보았다. 때마침 보성여관 건너편에 집 한 채가 보수공사 중이었다. 안내문을 살펴보니 옛 술도가집을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태백산맥의 등장인물 가운데 술도가집을 운영하는 정하섭과 관련된 곳이어서 관광지로 조성하려는 목적이었다.
지친 다리를 쉴 겸해서 주변 커피숍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시켜놓고 가져간 수필집 ‘징검다리 수필’ 제18집을 펼쳤다. 목차를 살펴보니 평소 안면이 있는 작가분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게 중에 제목이 마음에 가는 작품을 몇 편 읽어보니 인생의 연륜이 느껴지는 주옥같은 작품들이었다. 애틋하고 가슴이 찡하고 해학이 넘치는 글들을 읽으며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시에 관심을 두고 주로 시집만 읽어온 터였는데 수필을 읽는 즐거움이 의외로 크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기차 시간이 남아 전통시장을 구경했다. 추운 날씨에도 도로를 따라 할머니들이 노점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시장 안에는 평소 보기 쉽지 않은 갖가지 약재와 농산물, 해산물이 푸짐해 눈길을 끈다. 한 켠에 소라와 게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있어서 미처 팔지 못한 소라를 떨이채 샀다.  
그리고 광주행 기차를 타기 위해 대합실에 돌아왔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영향 때문인지 우리부부 외에 승객은 고작 한명뿐이었다.  
다시 기차에 몸을 실으니 어느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남녘 들판도 점차 어둠으로 물들고 오늘 하루 여행길이 꿈인 듯 아련하다. 덜컹거림과 기적소리가 마음속에 잔잔히 파문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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