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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시골 점쟁이 할머니의 예언

시골 점쟁이 할머니의 예언

나이가 60 고개에 접어드니 지나온 길이 드러난다. 그 길을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말한다. 사전에는 운명을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초인간적인 힘’으로 정의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앞날을 결정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내가 운명 이야기를 꺼낸 것은 33년째 언론사에 종사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볼 때, 운명의 힘에 의해 여기까지 이끌려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리고 한 점쟁이 노파의 말 한마디가 그 운명적인 행로의 길잡이 역할을 한 것 같다. 그 점쟁이 노파를 조우하게 된 일화를 소개해볼까 한다.
2003년의 일이다. 당시 나는 시청에 출입하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이면 시청 기자실에서는 실국별 주간업무 브리핑이 진행된다. 이 자리에는 기획실장을 비롯 국장과 산하 기관장이 참석하게 된다. 누구나 그렇듯이 인간관계에서 잘 통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당시 산하 기관장인 K씨와 사대가 잘 맞았다. 편한 인상이기도 하지만 공모를 통해 들어온 외부인사여서 그런지 시정현안에 대해서 생각이 트여있었다. 한마디로 공무원 느낌보다는 학자의 느낌이 들었다. 
서로의 생각 코드가 맞다보니 개인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고향이 강진 병영이었다. 당시 나의 아내는 병영 관내 학교에 재직하던 터라 자연스레 대화의 소재가 병영에 모아졌다. 그는 한창 고향 자랑을 하던 끝에 주말에 병영에 함께 가보자고 제안을 했다. 나 또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지라 하멜이 머물렀던 병영을 한번 가보고 싶었다.
어느 토요일 우리는 승용차를 타고 강진 병영으로 향했다. 먼저 찾은 곳은 K씨가 다녔던 병영초등학교. 이곳은 조선시대 전남 육군 사령부인 병영성이 있던 자리이다. 일제가 병영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학교를 세운 것이다. 교문 옆에는 이곳이 조선시대 병영성터였다는 안내판이 서있었다.
K씨는 “초등학교 때 운동장 밑으로 구들장처럼 생긴 배수로가 있어서 그 속으로 끼어다니며 놀았다”며 “훈련장에 물이 고이지 않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차를 타고 하멜이 노역을 하다가 쉬곤했다는 느티나무로 이동했다. 마을 어귀에 아름드리 느티나무 서너 그루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얼추 보아도 수령이 수백년은 넘어보였다. 하멜은 이 느티나무 그늘에 쉬면서 머나먼 네덜란드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K씨는 다시 나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골목길이 돌담장으로 이어져 운치가 있었다. K씨는 돌담장을 가리키며 “하멜이 네덜란드에서 쌓는 방식을 이곳에 전수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자세히 담장을 살펴보니 정말 돌의 배열이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나를 수인사로 안내했다. 수인산 자락에 둥지를 튼 아담한 사찰이었다. 계곡에서 맑은 산간수가 흐르고 있었다. 스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 하며 녹차를 내놓았다. 고요한 사찰에서 마시는 녹차맛은 은은한 향기와 더불어 내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 같았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는데 점쟁이 노파에게로 돌아가보자. K씨는 마을 초입에 있는 어느집 대문을 불쑥 열고 들어가더니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여기가 친척집인가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안방으로 향하지 않고 문간방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안에는 나이가 많은 늙은 노파 한분이 앉아 있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복채를 내놓고는 두 사람의 운세를 봐달라고 말했다. 노파는 K씨의 사주를 묻더니 한참 생각을 모은 끝에 “문서 운이 있다”며 “뜻하는 일이 잘 될거라”고 말했다. K씨는 만족스러운 듯 얼굴표정이 환해졌다. 이어 내 차례가 되었다. 노파는 내 얼굴을 보거나 내 사주도 묻지 않고 점괘를 내놓았다. “현재의 직업을 계속해서 가지시오. 자식들이 잘 될 거요. 노년까지 순탄하고 편안한 인생을 살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뜨악했다. 당시 회사가 어려워 적은 월급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은 터라 하루라도 빨리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노파의 말을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언론사 CEO라는 막중한 자리에 오르고 보니 그 노파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운명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인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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