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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쪽지에 얽힌 사연

“마주보는 사람끼리 마주보고 살아요”

 

1989년 M일보 기자 시절이다. 나는 당시 편집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편집부는 취재기자들이 작성한 기사를 지면에 display하는 일을 한다. 기사의 제목을 뽑고 중요도에 따라 크기를 정해 지면에 배열하는 작업이다. 뉴스에 대한 이해도와 함께 디자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편집기자들은 1개면씩을 맡아 전산오퍼레이터와 함께 편집프로그램 상에서 이 같은 작업을 수행한다.
이를 위해 2층 편집국과 3층 전산실을 오가며 마감시간에 맞춰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해 추석 무렵의 일이다. 출근해서 서랍을 열어보니 흰종이 쪽지와 함께 양말 한컬레가 놓여 있었다. 호기심에 쪽지를 펼쳐보니 “마주보는 사람끼리 마주보고 살아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가 비밀스럽게 핑크빛 마음을 전했을까 궁금증이 높아갔다.
그러나 이름이 써있지 않아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쪽지의 주인공은 남자는 아닐테고 분명 여자일텐데 내 옆자리에는 기혼여성과 남친이 있는 여성뿐이었다. 그렇다고 전산오퍼레이터가 2층까지 내려와 몰래 편지를 놓고갈리는 만무했다.
여러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온갖 촉을 살려 나름의 분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친 끝에 가장 근접한 사람으로 남친이 있는 여성을 지목하게 되었다. 그 여성이 나를 짝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조용히 시내 도청앞 지하다방에서 만나자고 했다. 직접 만나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같아서다. 나는 쪽지이야기는 접어둔 채 회사분위기 등 우회적인 화제를 끌어내며 그녀의 고백(?)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는 기대와 달리 냉랭한 태도로 ‘왜 나를 만나자고 했느냐?’는 표정이었다. 순간 내가 헛다리를 짚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뻘쭘해졌다. 나는 ‘그냥 차한잔 하고 싶었다’고 둘러대고 서둘러 다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 사건을 미제사건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살다보니 이런 해프닝도 있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설레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며칠이 지나갔다. 그런데 앞자리에 앉은 기혼 여성이 잠깐 나를 보자는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하고 휴게실에서 단둘이 만났는데 그녀 왈. “응큼하시네요. 쪽지를 받았으면 답을 해줘야지요”. “..........” 순간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릿속이 하애졌다. 이어 실망감이 업습해오면서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녀가 쪽지와 선물을 서랍에 넣어둔 이유는 회사동료로서 친하게 지내보자는 뜻이었는데 내가 핑크빛 메시지로 잘 못 오독한 것이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술 한잔 마시면 안주삼아 그 해프닝을 합석한 청자들에게 들려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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