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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비아극장을 아시나요

비아극장을 아시나요

농촌의 ‘밤문화’를 꽃피운 공간

 

 

1960년대 비아에는 면소재지 치고는 드물게 상설영화관이 존재했었다. 비아 중앙로 6(비아동 65-16), 현재 광영세차장 자리가 바로 그 곳이다.
도시나 읍내가 아닌 면소재지에 불과한 비아에 어떻게 영화관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TV가 보급되기 전인 1950년대에서 70년대 농촌에서 인기있는 볼거리는 영화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라 해가 지고나면 시골의 밤은 길고 무료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고된 농삿일에 파김치가 돼 일찍 잠들지만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뭔가 청춘을 발산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런데 비아는 일찍이 비아장이 개설돼 있고 국도 1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중심이라 흥밋거리가 있으면 인근지역 청춘남녀들이 쉽게 몰려 들었다.
신가리, 하남, 장성 남면에서도 먼 거리를 마다않고 영화를 보러왔다.
비아 토박이 서씨(1946년생)는 비아극장의 생생한 증언자이다. 서씨는 17세 무렵(1967년 추정) 비아극장에서 2년 정도 잡일을 하였다. 주로 하는 일은 자전거를 타고 마을 곳곳을 다니며 영화 포스터 붙이는 일과 자전거 혹은 경운기에 확성기를 싣고 마을을 돌며 영화 홍보하는 일이었다.
수완, 월계, 응암, 미산, 오룡 등 마을을 돌아다니며 동네 적당한 곳을 골라 포스터를 붙였다. 이 일은 보통 2인 1조가 되어 움직인다. 한명은 포스터를 붙이고, 한명은 자전거에 확성기와 배터리를 싣고 다니며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내고장 영화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며 영화 홍보를 하였다.
신점리에서는 방죽 위 언덕에 올라가 마을을 향해 확성기로 웅변하듯 홍보활동을 하였다.
이 때 동네 아이들은 이장에게 나눠주는 초대권을 한 장이라도 얻기 위한 욕심에 홍보차량을 따라 다니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또 극장 주변에는 호시탐탐 도둑 영화를 보려는 아이들이 진을 치기 일쑤였다. 극장 뒤편은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는데 이쪽은 분뇨를 뿌려놓은데다 경비가 허술해 아이들의 주된 비밀루트가 되었다. 하지만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구린내나는 화장실 밑을 통과해야 하는 고역이 뒤따랐다. 한번은 서씨 동생이 이곳으로 몰래 스며들어 막 변소 뚜껑을 열고 나오는데 때마침 이곳을 지키고 있던 극장직원에게 붙잡혀서 혼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서씨는 나중에는 영사기를 돌리기도 하였다. 필름은 송정리와 장성 영화관에서 자가용을 이용해 가져와서 상영하였다.
포스터 내용은 총천연색 시네마 스코프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서씨가 기억하는 영화로는 ‘홍도야 우지마라’(1965년 작품)가 생각난다. 관람료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150~200원 정도 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영화 관객은 대체로 젊은 청춘 남녀들이 많았다. 영화에 대한 호기심도 있지만 이성을 만나고자 하는 기대심리로 영화를 찾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영화관은 청춘남녀의 만남의 장이자 데이트장소가 되어 밤에 피는 야화처럼 흥분으로 넘쳐났다. 응암마을 진등에 종방 소유 누애방에서 일을 마친 아가씨들이 단체로 영화관람을 하면, 동네 총각들이 이들과 만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극장 내부는 마치 창고처럼 허술했다. 의자도 개인좌석이 아니라 긴 나무벤치였다. 실내 환기가 잘 안돼 담배를 피우면 연기가 자욱했다. 어두컴컴한 극장안에 기다란 나무 벤치여서 스킨십을 하기에 용이했다. 남성이 의도적으로 옆구리를 슬쩍 건드리면 여성이 옷핀으로 이 남성을 찌르며 경계하기도 했다.
비아극장은 1968년 경영난으로 상영을 중단하고 폐업 후 한 동안 가마니 창고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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