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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비아 응암 과수원

비아 응암 과수원

 

일제강점기에 조성

 

과수원은 경계를 따라 탱자울타리가 심어져 있어 마치 성곽처럼 닫혀있는 공간이다. 외부에서 침입하기도 어렵고 안을 들여다보기도 쉽지않다. 이는 과일을 따가지 못하도록 하는 보호막 역할을 할 목적도 있지만 아마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과수원을 조성하면서 조선인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요새를 구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논문에 의하면 구한말 의병들이 일본인 과수원을 습격한 기록들이 나타난다. 일본인 지주들은 공격에 대비해 러일전쟁에 참전한 퇴역군인을 용병으로 고용해 무기를 들고 방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탱자울타리는 담장역할을 하기 때문에 과수원이 밀집해 있는 지역은 마치 도시의 골목길을 연상시킨다. 또한 탱자울타리는 조경수 역할도 한다. 그래서 일년에 한차례씩 가지끝을 일정한 높이로 다듬어 주어야 단정한 느낌이 난다. 탱자나무 가지치기는 인부가 가마니를 덮고 올라가 커다란 전정가위로 웃자란 가지들을 쳐주는 방식이다.

박정희 시절 새마을운동이 농촌지역을 한창 들썩이게 하던 때이다. 우리마을(응암) 인근 미산마을이 새마을운동 우수마을로 선정돼 김종필 총리가 직접 마을을 방문해 기념비를 제막하는 행사가 있었다. 김 총리는 헬기를 타고 광주공항에 도착해 관용차로 미산마을에 오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자 광산군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신작로에 자갈을 새로 깔고 관용차가 지나가는 길 주변을 산뜻하게 단장하는 작업이 벌어졌다. 그 때 우리집 과수원 탱자울타리도 가지치기를 해서 말끔해졌다.

그러나 정작 김 총리가 탄 헬기는 무양중학교(현 비아중)에 착륙해서 마을로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바람에 싱겁게 끝나버린 셈이다. 김 총리는 이날 미산마을에서 새마을지도자들과 함께 기념비 제막식과 기념식수를 하고 미산저수지(현 쌍암호수공원)에서 물고기방류 행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탱자울타리로 인해 우리집 내부에 호기심을 가진 마을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안채가 보통 시골집과 달리 일본식 양철집이다 보니 더욱 그러했다. 쌍암마을에 살았던 후배 최모씨는 최근 필자에게 과수원을 지날 때마다 저기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늘 궁금했다고 회고했다.

 

비밀의 화원 호기심 가득 

 

과수원은 마을과 떨어진 고립된 공간이다. 하지만 내부에 존재하는 나무와 풀과 호수는 하나의 풍경을 이루며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살림집은 안채와 사랑채, 헛간, 창고로 이뤄져 있었다. 안채는 일본식 양철집이어서 계절마다 독특한 파장음을 낸다. 여름에 소나기가 내리는 날에는 빗방울이 양철지붕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탕탕탕 울린다. 막 소나기가 쏟아지는 순간 울리는 소리는 마치 총소리처럼 예리해서 깜짝 놀라게 한다. 이후 곧 중저음으로 바뀌어 방안에 있으면 스스르 잠들게 한다. 겨울 삭풍이 불면 양철집 지붕은 음산한 신음소리를 낸다. 윙윙 소리는 긴 밤 내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는다.

과수원안은 구릉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감나무 70여그루, 복숭아나무 50여그루가 있었다. 군데 군데 밭이 있고 작은 연못이 있었다. 나에게는 하나의 작은 우주 세계였다.

봄에는 나무들이 새잎을 틔우느라 분주하다. 밭에는 파릇파릇 보리가 제법 자랐다. 과수원의 봄은 복사꽃이 필 때쯤 절정으로 치닫는다. 복숭아나무 가지가 일제히 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면 과수원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된다.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져 과수원의 내부는 동굴처럼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가을에는 나뭇잎 사이로 노랗게 익은 과일이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가을 저녁 달빛 아래 나뭇가지 그림자가 마당에 마치 한폭의 동양화처럼 수묵화를 그려놓는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광주 도회지 사람들이 찾아와 수박이나 복숭아, 감 등 과일을 시켜놓고 나무그늘 아래에서 여흥을 즐기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겨울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나뭇잎들이 광합성 작용을 멈추고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지면 과수원은 폭풍의 언덕처럼 쓸쓸한 풍경을 연출한다. 또한 이 때에는 이듬해 봄을 대비해 가지치기와 거름주기를 해야 한다. 고된 노동의 연속이다. 잘려나간 나뭇가지를 땔감으로 쓰기 위해 하나하나 주워서 묶는 게 만만치 않다. 거름을 주기 위해 나무 둘레 흙을 파내는 작업도 여간 고생스럽지 않다.

저수지를 건너 북풍이 불어오면 앙상한 나무들은 회초리를 맞은 듯 비명소리를 질러댄다. 그러다가 한 겨울 눈이 내리면 과수원은 오히려 포근하고 평화롭다. 꿩이 날아오는 것도 이 무렵이다. 사냥꾼들도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온다. 장총을 맨 미군 군인복장을 한 사냥꾼이 포인터라 불리는 점박이 사냥개를 앞세우고 들어와 꿩과 추격전을 벌인다. 꼬부랑 말씨를 쓰던 그들은 우리형제에게 손짓과 의성어로 가까이 오면 위험하다는 주의를 주는 것 같았다. 총소리와 함께 푸드덕 날던 꿩이 곤두박질치자 사냥개는 날쌔게 달려가 전리품을 물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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