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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과수원에서의 일상

과수원에서의 일상

 

과수원에서의 일상은 여느 시골집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 탱자울타리 안에는 부모님과 41녀 우리 가족만 살았다. 그래서 이웃과 접촉이 많지 않고 농사일을 대부분 우리가족의 힘으로 해야했다. 얼마간 잠시 머슴이 들어와 일손을 돕기도 했지만 어린 우리형제들도 고된 농사일에 일손을 보태야 했다.

특히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고계셔서 오랜시간 육체노동은 힘들어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주도적으로 집안일을 꾸려가셨다.

여기서 잠시 집안 내부구조를 설명해본다. 안채가 일본식 양철집이어서 내부 역시 기본적으로 다다미방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넓은 대청마루가 있었다. 안방의 경우 미닫이 벽장이 있었고 방마다 창이 달려 있었다. 작은방에는 벽장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할아버지 위패를 모신 제실이 있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딱 한가지 논에서 개구리를 잡아서 끓여서 나에게 먹이셨던 기억은 있다. 우무가사리처럼 굳어진 개구리 맛이 약간 달큰했던 것 같다.

나는 때때로 작은 방 벽장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처럼 생긴 위패함에 앉아 놀곤했다. 어렸기 때문에 그곳이 제실인지는 전혀 몰랐다. 제사때가 되면 고모들이 찾아와 벽장문을 열어놓고 상복을 입은 채 위패를 향해 곡을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폐결핵을 앓고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건강이 늘 염려되었다. 아버지는 기독병원(당시 제중병원)을 다니시면서 치료를 받았는데 어머니는 반 간호사 역할을 하였다. 약을 타기 위해 병원에서 하루종일 기다려야 하는가 하면 직접 주사를 놓기도 했다.

아버지는 통원치료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온갖 민간요법을 동원하였다. 뱀과 구렁이는 물론이고 굼뱅이 등 건강 회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가리지 않고 드셨다. 이 소문을 듣고 마을 청년들이 뱀이나 구렁이를 잡으면 우리집으로 가져와 팔았다. 우리 형제들도 어머니의 지시로 아침마다 과수원안에 있는 콩밭에 나가 호미로 굼뱅이를 잡아서 깡통에 담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이었다. 갑자기 아버지의 상태가 안좋아졌다. 안방에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슬프게 들렸다. 내가 안방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누워계셨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곧 돌아가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우리형제들도 함께 울었다. 아버지는 서둘러 병원으로 실려갔고 며칠 후 다시 집으로 오셨다. 그 후 아버지는 점차 좋아지셔서 완쾌되어 82세까지 건강하게 사셨다.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강한 집념이 병마를 이겨낸 것 같다.

우리집 마당에는 장독대와 작두샘이 있었다. 장독대 주위에는 다알리아, 맨드라미, 코스모스, 봉숭아꽃이 철따라 환하게 피어있었다. 그중 다알리아꽃이 유독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작두샘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마치 시소를 타듯 온힘을 다해 지렛대 손잡이를 누르면 맑은 물이 콸콸 쏟아져나왔다. 겨울에는 피스톤 역할을 하는 통이 얼기 때문에 물을 빼야 한다.

과수원에서 또 다른 놀이터는 작은 연못과 대숲이다. 어느 여름날 연못엘 놀러를 갔다. 마침 넓적한 항아리가 있어서 물에 띄워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서 뱀 한 마리가 나타나 물위를 헤엄쳐 오는 것이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연못을 도망쳐 나왔다.

대나무숲은 어둡고 음산해서 잘 들어가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봄에는 죽순이 자라기 때문에 부모님과 함께 죽순을 캐러가는 경우가 있다. 여기저기 쇠뿔처럼 올라온 죽순을 보면 신기하다. 우리 형제들은 간혹 두패로 나뉘어서 전쟁놀이를 하였다. 나와 막내동생은 대나무숲을 진지로 삼고, 형과 셋째동생은 창고를 진지로 삼았다. 그리고 대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을 쏘면서 한바탕 전투를 벌였다.

이처럼 과수원에서 보낸 일상은 조금은 특별하면서도 사람의 인정이 그리운 섬같은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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