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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날의 풍경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1)옛 집의 기억

(1)옛 집의 기억

 

나는 19704학년초에 광산군 B 국민학교에서 광주 Y국민학교로 전학을 왔다. 우리 부모님은 과수원을 경작하셨는데 임대로 살던 곳이라 계약기간이 끝나 어쩔 수 없이 광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 과수원은 모 중학교 소유로 원래는 일본인 소유였는데 해방과 더불어 적산이 된 과수원을 주민들이 여론을 형성해 교육용 재산으로 귀속시켰다.

우리 가족이 광주로 이사올 때 가진 돈은 전년도 가을에 감을 수확해 판돈이 전부였다. 그 돈은 상하방 전세를 얻고 나머지는 고작 한 두달 생활비로 쓸 수 있는 정도였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에다 형제가 41녀로 대가족이었는데, 방을 구할 때 식구가 많다는 이유로 집주인들이 꺼려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겨우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 집 주인의 자녀가 여덟명이나 되어 자녀가 많은 게 이해되었다고 한다.

그 집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동네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발관을 중심으로 세 갈래 골목길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가난 그 자체였으며 대부분이 시장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삶이었다. 더러는 식자층도 있었는데 초중등 교사, 군 영관장교, 공무원 등이 있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국수공장이었다. 우리가 사는 방 바로 앞에 국수기계가 놓여 있어 국수를 뽑는 날은 기계가 돌아가는 소음 때문에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그리고 간혹 내가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가 화가 나시면 국수 건조에 사용되는 시누대를 빌려와 때리곤 하셨다. 마당에는 국수를 말리기 위해 건조대를 설치해 놓아 놀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하지만 집 주인 딸이 국수를 뽑고 남은 자투리 밀반죽을 연탄불에 구워 몰래 건네주곤 해서 맛있게 먹곤 했다. 또한 간혹 국수를 사러온 같은 반 아이를 볼 수 있었다.

4월쯤이라 마당 화단에 심어진 나무에 보랏빛 꽃이 예쁘게 맺혀 있었다. 주인집 딸은 그 꽃을 가리켜 밥티꽃이라고 알려주었다. 모양새가 밥톨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