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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날의 풍경

고향집 과수원이 문학의 탯자리

박준수-나의 문청시절 이야기<1>

고향집 과수원이 문학의 탯자리

사계절 변화 통해 자연의 언어 배워

외국 번역시집 읽으며 몽환적 시세계 체험

문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문청(文靑)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나의 문학의 탯자리는 유년시절 고향집이 아닌가 싶다.

나는 광주 남구 서동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얼마 후 할아버지가 계시는 광산군 비아면 쌍암리(현재 첨단단지)과수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과수원안에는 감나무 90여그루, 복숭아 70여그루, 그리고 밭이 얼마쯤 자리하고 있었다. 과수원은 나에게 계절의 변화를 통해 자연에 대한 정서적 감각을 일깨워주었고 자연의 언어를 배우게 했다. 고향 마을은 저 멀리 병풍산이 우뚝 솟아있고 지척에는 황룡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상이었다. 병풍산 정상부근에 우뚝 솟은 큰 바위는 미국 사우스다코다 러시모아산(Mount Rushmore)에 있는 미국 대통령 조각상 큰 바위 얼굴을 연상시킨다. 아침이면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의 햇빛에 반사되어 거울처럼 빛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첨단과학단지가 들어서면서 대지의 지형은 완전히 바뀌었다. 고즈넉한 전원 풍경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건물들로 가득한 도시가 되었다. 한마디로 상전벽해가 일어났다.

비아면 쌍암리 고향집 과수원 앞을 지난 신작로길. 질척거리는 황톳길이 어린시절 그대로이다.(1983.01)

그렇다면 쌍암리 일대는 예전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곳은 원래 야트막한 구릉지로 배, , 복숭아 과수원이 밀집해 있었다. 그리고 인근에는 응암, 미산, 장구촌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연부락이 군데군데 섬처럼 붙박혀 있었다.

 

 

국도 1호선 지나는 교통 요충지

 

주민들의 생업은 과수원 경작과 농업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과수원은 응암부락에 집단으로 형성돼 있었는데 아마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들어와 원예농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과수원 안집 주택은 양철집 겉모양에 내부는 다다미방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주된 생활은 비아읍(현재 비아동)을 거점으로 이루어졌다. 비아읍은 작은 면소재지에 불과하지만 국도 1호선이 통과하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이자 교육, 소비, 문화의 중심이었다. 광주, 송정, 담양(대치), 서울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해 시외버스들이 수시로 지나갔다. 일제 강점기에 개교한 비아초등학교와 탐진 최씨 문중에서 설립한 무양중학교(현재 비아중학교)가 일찍이 근대식 배움터로 자리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조선시대 후기부터 맥을 이어온 비아 오일장이 시끌벅적하게 열렸고, 농촌지역으로는 드물게 영화관(비아극장)이 영업하고 있었다. 이밖에 읍내에는 성당 공소를 비롯 면사무소, 보건소, 지소, 우체국과 같은 기관들이 큰 길 주변으로 포진해 있었다.

비아읍에서 담양 대치로 가는 신작로 양편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줄지어 서 있어 봄에는 하얗게 꽃을 피우고 상큼한 꽃향기를 바람에 날렸다.

                                  

19831월 비아초등학교 전경. 현대식 교실 뒤편에 일제시대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

옛 길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GS 주유소 삼거리에서 비아초등학교 가는 길은 예전 그대로의 신작로 길이다. 길 옆으로 무덤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다. 이 일대가 예전에 공동묘지였는데 일부가 남아 있다.

 

 

 

학생들은 이 신작로를 따라 마을별로 무리지어 학교를 오갔다. 간혹 아카시아꽃을 따먹기도 하고 겨울에는 칼바람을 피하기 위해 신작로 대신 논길을 따라 고개를 숙인 채 낮은 자세로 걸어가곤 했다.

이 일대에는 꽤 큰 저수지가 두 군데 있었다. 응암부락에서 미산부락 가는 길목과 응암에서 장구촌 사이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동쪽 방죽’, ‘서쪽 방죽으로 불렀다. 지금 첨단호수공원은 미산부락 가는 길목에 있던 것을 넓힌 것이다. 장구촌 인근 저수지는 매립한 것으로 보인다. 장구촌 마을을 가려면 저수지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밤에 달빛이 비친 하얀 수면은 무섭기 보다는 은은한 안도감을 주었다.

동네 아이들은 등굣길에 물수제비 경쟁을 심심치 않게 벌였다. 신작로에 있는 조약돌을 주워 저수지 물위에 던져서 더 멀리 더 많이 튕겨지면 이기는 게임이다.

저수지에는 거의 매년 여름방학에 사람이 빠져 죽었다.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 희생자였으며 시신을 물위로 떠오르게 할 목적으로 굿을 하는 모습이 슬프게 비쳐졌다.

무양중학교에서는 추석이 오면 축제를 벌였다. 마을 어르신들을 초청해 강강수월래와 태권도 시범 등을 선보이고 맛있는 음식도 대접했다. 보름달 아래 흰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손에 손잡고 강강수월래를 노래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양 아름다웠다.

 

옛 지도에 나올 만큼 큰 비아장

 

미산마을에는 방앗간이 있었다. 방앗간 집 중학생 아들은 동네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무양중학교 인근에는 기갑부대가 있었다. 훈련을 마친 탱크와 장갑차들이 캐터필러에 진흙을 잔뜩 끌어안은 채 뒤엉켜 있는 광경은 퍽이나 기괴한 모습이었다. 이곳 군인들은 설날이면 기다란 색(sack)을 둘러매고 농가를 찾아와 떡국과 떡 등 명절음식을 받아가곤 했다.

마을에는 종연방직 뽕나무밭이 있었다. 잠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네 처녀들이 머리수건을 두르고 뽕잎을 따며 노래를 불렀다. 한번은 어머니를 따라 이웃집 과수원에 놀러갔다가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헛간 문을 열었다가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수많은 누에들이 뽕잎을 갉아먹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본 터라 까무라칠 뻔 했다. 여름날 까맣게 익은 오디(뽕나무 열매)는 무척 달콤했다.

비아장은 1872년 광주읍지도(서울대 규장각 소장)에 나올 정도로 큰 장이었다. 장날이면 비아면 소재지 일대가 축제장처럼 들썩거렸다. 우체국 등이 자리한 읍내대로 뒤편에서 비아초등학교 앞까지 장옥이 잇따라 늘어서 온갖 신기한 물건들을 진열해놓고 난전을 펼쳤다.

신기료 장수가 고무신을 때우는 광경, 튀밥장수가 ~’ 소리와 함께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광경은 조마조마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면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붙이를 쇠망치로 두드려 낫과 쇠스랑 등 농기구룰 만드는 광경이 눈에 잡힐 듯 선하다.

봄이면 언 눈이 녹아 진창길로 변한 마을길은 한바탕 씨름장으로 변한다. 지대가 낮아 질척거리는 길을 나서는 게 여간 불편스러운 게 아니다. 그래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황토밭이

 

                                  

 

쌍암리에서 미산으로 가는 중간에 저수지가 있었다(1983.01). 1990년대에 첨단단지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쌍암호수공원이 되었다.

 

 

 

어서 흙이 찰졌다. 그리고 황토흙에서 자란 무와 배추가 인기가 많아 높은 값에 팔렸다. 옹기가마가 있었던 것도 황토흙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옹기를 구우려면 양질의 흙과 땔감과 물이 풍부해야 하는데 3박자를 모두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과수원 지대라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게 감지된다. 봄이면 신록과 함께 분홍색 복숭아꽃과 하얀 배꽃이 무릉도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져 과수원의 내부는 동굴처럼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가을에는 나뭇잎 사이로 노랗게 익은 과일이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여름 혹은 가을이면 광주 도회지 사람들이 찾아와 수박이나 복숭아, 감 등 과일을 시켜놓고 나무그늘 아래에서 노래부르면서 여흥을 즐기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겨울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나뭇잎들이 광합성 작용을 멈추고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지면 과수원은 폭풍의 언덕으로 변한다. 또한 까마귀떼가 출몰해 까악~까악~’ 우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어 음산한 풍경을 연출한다. ‘비아(飛鴉)’라는 지명도 바로 이 까마귀떼 서식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에는 이듬해 봄을 대비해 가지치기와 거름주기를 해야 한다. 고된 노동의 연속이다. 잘려나간 나뭇가지를 땔감으로 쓰기 위해 하나하나 주워서 묶는 게 만만치 않다. 거름을 주기 위해 나무 둘레 흙을 파내는 작업도 여간 고생스럽지 않다.

삭풍이 불어오면 앙상한 나무들은 회초리를 맞은 듯 비명소리를 질러댄다. 덩달아 과수원 양철집 지붕도 음산한 신음소리를 낸다. 윙윙 소리는 긴 밤 내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한 겨울 눈이 내리면 과수원은 오히려 포근하고 평화롭다. 꿩이 날아오는 것도 이 무렵이다. 사냥꾼들도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온다. 장총을 맨 군인복장의 사냥꾼이 포인터라 불리는 점박이 사냥개를 앞세우고 들어와 꿩과 추격전을 벌인다. 꼬부랑 말씨를 쓰던 그는 손짓과 의성어로 가까이 오면 위험하다는 주의를 주는 것 같았다. 총소리와 함께 푸드덕 날던 꿩이 곤두박질치자 사냥개는 날쌔게 달려가 전리품을 물고 왔다.

마을에 송인섭씨 과수원이 있었다. 5·16 박정희군부 시절 소령이었던 송씨는 전남 어느 지역 군수로 재직하였는데 이곳 마을에 있는 자신의 과수원에 짚차를 타고 들르곤 했다. 이들 가족은 때때로 말을 타고 마을을 질주해 아이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송씨는 비아초등학교 교문을 세워주기도 하는 등 마을 유지행세를 했다.

현재 대우아파트 자리는 원래 순천박씨 선산이었다. 낮은 구릉형태의 야산이었으나 숲이 우거져 있었고 아늑한 경사지가 있어 초등학교 소풍지로 제격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 방송국 송신소가 세워져 밤이면 불빛을 깜박거렸다. 이처럼 유년의 고향집은 나의 시 창작에 많은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내가 문학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시기는 1970년대 후반 사춘기 무렵이 아닌가 싶다. 1970년 우리 가족은 비아에서 광주로 올라와 양동에서 살았다. 나는 1973년 광주 양동초등학교 졸업 후 몇 년간 공장엘 다니다 뒤늦게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지금의 전일빌딩에 있었던 전일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중 문득 시상이 떠오른 것이 아닌가. 연습장에 몇 줄을 적어서 친구에게 보여주니 잘 썼다며 한껏 치켜세워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순간 낙서에 불과한 것인데 그 친구는 내 체면을 생각해서 일부러 감동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그 이후 나는 그 친구의 칭찬에 고무되어 틈틈이 글을 써서 주변 친구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의 덧없는 글쓰기에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그 당시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충장로와 대학가에는 DJ가 신청음악과 함께 사연을 전해주는 음악다방이 많았다. 나는 친구들과 음악다방에 가면 어김없이 쪽지에 자작시를 몇 줄 적어서 팝송을 신청하곤 했다. 그러면 잠시후 DJ가 멋진 목소리로 내 사연을 소개하며 신청한 음악을 들려줄 때 묘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글재주를 맹신하며 시인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원 수업을 마치면 전일빌딩 1층 서점에 들러 외국시인의 번역시집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민음사에서 발간한 얇은 시집으로 E.A. 포우, 죤 키이츠, 하이네, 브들레르, 말라르메, R.M.릴케 등 수많은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원문과 함께 번역된 시는 난해한 표현이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 가슴을 뜨겁게 했다. 특히, ‘장미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삶과 시는 나의 정서와 너무도 잘 맞았다. 제도권 교육을 벗어나 검정고시를 준비하느라 외로움과 불안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시절, 나는 이국풍의 시에 취해 몽환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인·광주매일신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