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

문화수도, 감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문화수도, 감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입력날짜 : 2013. 11.12. 00:00

‘금남로는 사랑이었다/ 내가 노래와 평화에/ 눈을 뜬 봄날의 언덕이었다’. 이 싯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5·18 아카이브가 들어설 옛 가톨릭센터 건물에 내걸린 김준태 시인의 시 한 구절이다.

이 짧은 시 한 줄이 80년 그날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민주화를 향한 시민적 각성과 공동체정신이 오롯이 서려있어 5·18 아카이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잊지 마세요, 당신도 누군가의 영웅입니다’. 서울시립도서관 외벽에 걸린 이 글귀는 취업난 시대 도서관을 찾는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운다. 최고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꼭 취업에 성공할 것을 응원하는 격려가 포근하다.

이처럼 짧지만 감성적인 메시지가 삭막한 도시에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최근 서울 등 각 도시마다 희망과 용기를 북돋는 힐링 메시지들이 도시홍보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다.

그러나 광주도심 주변을 둘러보라. 온갖 구호들이 적힌 플래카드들이 어지럽게 내걸려 아우성치고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또는 상업적 목적으로 홍수를 이루고 있는 플래카드는 광주의 이미지에 부정적 인상을 각인시킨다.

얼마 전 광주를 찾은 대구지역 한 대학교수는 과격한 구호들이 쓰인 플래카드들이 곳곳마다 나붙어있는 것을 보고 사뭇 움츠러드는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익숙해져 스스럼없이 행하는 표현방식들이 외지인들에게는 거부감을 주는 것이다.

특히 부정적인 구호는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 정보처리에 있어 부정적 프로세스를 활성화시켜 도시이미지 형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반대로 부드럽고 순화된 표현은 감성을 자극해 호의적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시대의 투쟁적인 구호는 아름다웠다. 전사시인으로 불리는 김남주의 시는 날카롭지만 암울한 시대적 배경속에서 잉태된 것이라 감동을 준다. 하지만 인터넷, SNS가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는 요즈음, 80~90년대식 고전적인 생경한 구호는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한다.

필자가 3년 전 취재차 영국 버밍엄을 방문했을 때 목격한 몇가지는 지금도 특별한 인상을 갖게 한다.

런던에서 코치(고속버스)를 타고 버밍엄 시내로 가는 중에 버밍엄 공항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대합실 건물위에 ‘세계 만남의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컨벤션도시로 유명한 버밍엄의 브랜드를 간결하면서도 호감있게 방문객의 마음속에 전달하는 문구였다.

다음날은 때마침 연금축소에 반발해 공무원과 교사노조가 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일단의 시위대가 필자가 묵고 있는 호텔 앞을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깔모자를 쓰고 커다란 북을 치며 흘러가는 모습이 마치 곡예단이 공연 홍보차 행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찰 역시 높은 장대목발에 올라 겅중겅중 걸으며 시위대의 진로를 안전하게 유도하고 있었다.

다음날 보도된 신문을 보니 학교가 휴업하고 일부 관공서 민원업무가 중단돼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사진을 보면 축제의 한 장면처럼 평온하다.

잠시 광주의 관문을 살펴보자. 예술과 문화적 향기가 느껴지기 보다는 숨막히는 구호들과 즐비한 향락업소들이 먼저 다가온다. 광주가 정치의 도시, 민주화의 도시라는 역사적 역동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화수도 광주가 생경하고 격렬한 퍼포먼스로 들끓어서는 안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는 비록 쉽고 간결한 문장이지만 강한 호소력과 감동을 주는 힘을 발휘해 미국 사회에서 흑인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때 광주는 다방마다 서예나 동양화를 내걸어 예향의 이름값을 톡톡히 한 적이 있다. 다방이 쇠퇴하면서 이런 문화가 사라졌지만 이제는 문학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메시지로 광주를 새롭게 이미지매이킹(image making)해야 한다. 전라도 사람을 ‘홍어’로 비하하는 언어폭력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과격하고 자극적인 정치적 구호 대신 격조있는 감성적 표현문화가 녹아들어야 한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방대학, 다시 깃발을 높이 들어라   (0) 2013.12.10
점집이 붐비는 이유  (0) 2013.11.26
가을 축제 속으로   (0) 2013.10.29
호남은 과연 '아껴둔 땅'인가  (0) 2013.10.03
가라츠<唐津>의 추억   (0) 2013.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