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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005~2010)

아련한 재래시장의 추억 

아련한 재래시장의 추억 


 

입력날짜 : 2008. 09.02. 00:00

 박준수 경제부장
 
 추석이 채 보름도 안남았다. 농경사회의 대표적인 축제 한마당인 추석이 산업화와 정보화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예전의 흥청거림이 사라지고 '또 하나의 휴일'로 변해가는 것같아 안타깝다.
 추석이 다가오면 40, 5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북적거리는 재래시장의 풍경을 아련히 떠올릴 것이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추석대목의 재래시장은 훈훈한 인정과 흥정의 소란스러움으로 넘쳐났다. 비록 살림살이가 넉넉지는 않았지만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얼굴에 여유와 웃음이 묻어났다. 당시만 하더라도 백화점이나 할인점같은 현대식 점포들이 많지 않은 터라 재래시장은 추석경기가 옴팍지게 꿈틀대는 저자거리였다. 게다가 단순히 상거래가 이뤄지는 장소뿐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의 정한과 풍속이 살아숨쉬는, 그야말로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향같은 곳이었다.
 어릴적 필자의 기억속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재래시장은 광산구 비아동 '비아5일장'이다. 그 당시는 광산군 비아면이었는데, 비아초등학교 바로 옆에 재래시장이 자리하고 있어 장이 서는 날이면 진귀한 물건들을 펼쳐놓고 파는 광경이 무척 흥미로웠다. 특히 한여름 대장간에서 풀무질하는 모습이라든지, 고무신을 떼우는 신기료 장수, 튀밥기계의 가슴졸이는 굉음 등 이제는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그리워진다.
 이어 광주로 이사와서는 양동시장으로 곧잘 심부름을 다녔다. 양동시장 인근에서 살았기 때문에 저녁찬거리를 사거나 자잘한 생필품을 사려면 동네 구멍가게보다 양동시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1973년 복개상가가 들어서기전 양동시장은 광주천변을 따라 '전남제사'(지금 금호생명빌딩 자리)앞까지 목재건물 상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양동시장은 광주천변에 불법으로 건축된 목조식 상가들을 철거하고 복개상가를 세우면서 호남최대 상권으로서 전성기를 맞게된다.
 광주지역 최초의 주상 복합건물로 지어진 복개상가에는 오늘날 백화점처럼 가구와 의류, 신발, 보석, 침구류 등 다양한 상품구색에다 고급브랜드를 갖추고 있어 호남의 유통을 선도했다. 이 당시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라면 대부분 이곳에서 혼수품을 장만했다.
 그러나 90년대들어 국내 대기업들이 지방에 대형쇼핑몰을 건립하면서 재래시장은 차츰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백화점과 할인점의 등장은 주거문화가 아파트로 바뀌고 마이카족이 증가하는 것과 맞물려 도시소비자의 새로운 소비행태를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비자들은 쾌적하고 고급스러운 백화점을 이용하면서 마치 자신이 TV광고속 주인공이 된듯한 착각속에서 감각적인 소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통업체들은 미국 등 소비천국에서 오랜기간 연구한 마케팅기법을 도입, 지역 소비자들을 백화점과 할인점의 단골고객으로 만들어갔다.
 'Everyday Low Price', '타임서비스', '바겐세일', '경품제공' 등 소비자의 구매심리를 자극하는 온갖 구호와 판매방식을 동원해 고객들의 발길을 재래시장으로부터 쇼핑몰로 돌리게끔했다.
 반면 다수의 영세 상인들로 구성된 재래시장은 대형쇼핑몰의 공격적인 시장잠식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인프라에다 빈약한 자본력과 지휘체계의 상실로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급속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그동안 정부와 지자체가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시장별 특화전략을 비롯해 시설현대화, 주차장 확충, 상품권 발행 등 갖가지 활성화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뚜렷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몇년전만 하더라도 명절이면 꼬박꼬박 재래시장을 찾던 중년 소비자들로 인해 반짝 성시를 이루던 재래시장이 해가 갈수록 썰렁해지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번 추석은 연휴가 짧고 불경기까지 겹쳐 재래시장 경기가 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어 상인들의 한숨소리만 가득하다는 보도이다. '하루벌어 하루먹는' 영세상인들이 올 추석에는 조금이라도 돈구경을 할 수 있도록 재래시장에서 추석장보기를 하면 어떨까. 이번 주에는 재래시장을 찾아 제수용품을 고르면서 옛날의 향수에 젖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