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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어머니의 사진

어머니의 사진
‘제4회 함께 나누고싶은 이야기’ 당선작 / 박준수

 지난 10년 세월을 돌이켜보면 사진 한 장이 클로즈업 된다. 내 방 오른쪽 벽면에 걸린 커다란 액자로 장식된 사진의 주인공은 나의 어머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는 이 사진에서 당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 즉 나의 외할머니와 다정히 포즈를 취한 모습이다. 언젠가 경남 양산에서 사시는 외할머니댁에 방문했다가 두분이 소풍길에 찍은 사진이다.

 내가 이 사진을 간직해온지도 어언 8년째.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사진을 보면서도 나는 가슴이 저려온다. 지금 두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두분중 먼저 가신 분은 어머니다. 딸의 죽음을 먼곳에서 접한 외할머니는 나의 어머니에게 불효자라며 혼잣말로 나무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지난 1992년 추석 전날 오후 2시 무렵 아파트 입구 도로에서 시내버스에 치여 뇌사상태로 일주일간 병원에 계시다 끝내 돌아가셨다. 지금도 그 순간은 생생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회사에서 잔업중에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이 왔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H병원에 달려가보니 어머니는 두눈을 감고 말문을 닫은 채 누워계셨다.

 의사는 응급진단을 해보더니 종합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러나 종합병원에서도 회생가능성이 희박하니 집으로 모셔가라고 떠밀었다. 집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기다렸는데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가던 당신의 몸이 온기가 돌면서 얼굴에도 화색이 역력했다. 우리 가족은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다시 어머니를 싣고 종합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의사는 일시적인 현상일뿐 상태가 호전된게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어머니를 중환자실로 입원시켰다. 입원직 후 어머니는 버스에 부딪혀 찢어진 이마를 봉합수술하기 위해 병원에서 삭발했는데 나중에 주위환자 가족들이 그 모습을 보고 스님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다 보다고 수군거리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나는 퇴근후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병실복도에 돗자리를 펴고 대기하고 있다가 간호사의 부름이 있으면 들어가 거들어줘야 했는데 새벽 한밤중 간호사가 보호자를 찾을 때마다 임종시각이 다가온줄로 생각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그 대기시간동안 어머니와 함께 한 추억들이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너무도 아름답고 슬픈 영상이었다. 나는 병원 부속 예배당에서 어머니의 고달픈 영혼을 위로하면서도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했다. 어머니는 그 병원에서 일주일동안  계시다가 아무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한 많은 세상을 뜨셨다. 당신의 나이 고작 56세.

 당시 내 나이 서른두살이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비통했다. 장례기간중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형제들 우는 모습을 보고 서로 울곤 했다. 그리고 한동안 어머니가 살아돌아오신 꿈을 꾸고 기뻐하다가 깨고보면 허탈했다.

 누구나 자신의 혈육이 죽음을 당하면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경험한다. 그리고 망자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는 소설보다도 더 기막힌 생애를 살다가셨다고 생각된다.

 스무살 때 중농집안에 시집오셨으나 빚보증에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병고가 겹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어린 자식들을 등에 업고 행상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당시 60~70년대 초는 돈이 귀해 물건값으로 쌀, 보리 등 곡물을 받았는데 그것을 머리에 이고 수십리 길을 걸으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광산 비아에서 마지막 농사를 처분하고 70년대초 광주로 올라와 양동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다가 이듬해부터 대인시장에서 20여년간 조기장사를 하셨다. 그 희생으로 우리 다섯남매를 남부끄럽지 않게 키우고 가르치셨다.

 어머니는 거의 평생동안 명절을 제외하곤 눈비 가리지 않고 새벽 통금이 풀리는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도매시장에 나가셨다. 그리고 물건을 받아두었다가 집에 오셔서 아침을 들고 나가 하루종일 남의 가게 한켠에서 좌판을 지키다가 밤늦게 오시곤 했다. 사고당일에도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가셨다가 변을 당하셨다.

 나는 사고며칠전 시장에 나가시는 뒷모습을 보고 어머니하고 불렀는데 알아채지 못하고 가시던 그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불효자의 회한이 가슴을 짓눌러온다. 고단한 이승을 떠나 어머니가 생전에 하시던 말씀처럼 옥황상제의 딸로 천상에서 영화를 느리시길 기원해본다.

 나는 어머니의 삶이 너무 억울해 몇해 전 묘 앞에다 시비를 세워드렸다.

 당신의 쉰 여섯해 삶/ 눈발같이 허공에 졌어도/ 티끌세상 연꽃처럼 웃으시며/ 넓으신 품안 다섯남매 고이 기르시니/ 아, 가엾는 사랑/ 비록 몸은 한줌 흙으로 누우셨어도/ 크신 은혜 별처럼 빛나이다.

 내 나이 어느새 불혹. 세 아이와 아내의 가장. 지난 10년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나는 인생의 극적인 터널을 지나온 것만 같다. 91년 3년간 다니던 회사에서 새로운 회사로 전직했고, 이듬해 늦은 나이에 결혼,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리고 93년 첫 아이를 낳았고, 95년 둘째아이 출산, 96년 내집 마련, 99년 외할머니 타계, 올해 7월 셋째아이를 보았다.

 물론 국내외적으로도 외환위기, 남북정상회담 등 격변기였지만 지난 10년의 세월은 내인생에서 가장 굵은 나이테를 그리고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와 당신의 어머니가 숲속 그늘아래 다정히 정담을 나누는 사진 한 장으로 함축돼 있다.

 흔히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생을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로 비유한다. 찰나의 인생길에서 아름답고 값진 추억을 나의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것이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하고 가신 어머니의 유언이 아닐까 생각한다.

 

2000-11-10 조회수 :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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