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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문화가 지역을 바꾼다

문화가 지역을 바꾼다

 

갑오년 그믐 마지막 햇살이 유난히 부시던 날, 벌교를 다녀왔다. 당초 경전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겨울대지의 은빛 파노라마를 감상하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승용차를 타고 한바퀴 바람을 쐬었다. 익히 알다시피 벌교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번 여행도 ‘태백산맥’의 숨결을 현장에서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작품 발표 이후 숱한 논란 속에서도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태백산맥’의 장중한 작품성은 비단 문학의 경계뿐 아니라 지성사회를 뒤흔든 유구한 생명력을 발현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광주에서 벌교로 가는 길은 국도를 거쳐 고속도로를 경유해 1시간 남짓 걸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겨울 풍경은 잿빛으로 물들어 무겁게 가라앉아 있지만 산등성마다 남은 하얀 잔설이 기분을 들뜨게 한다.

 

소설 ‘태백산맥’의 현장 벌교는 지금

 

 

고속도로를 나와 벌교에 접어드니 읍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학관이 자리잡은 제석산 아래쪽으로는 평평한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태백산맥 문학관에 다다르니 벌써 주차장에 탐방객들 차량이 즐비하다. 문학관 건물은 소설 태백산맥의 메시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김원씨는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어둠에 묻혀버린 우리의 현대사를 보며 동굴과 굿판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고 절제된 건축양식을 시각화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문학관은 표층으로부터 10m 아래에 자리잡았고 옹벽 벽면에는 백두대간의 염원을 담은 이종상 화백의 벽화가 일체감을 이루고 있다.
표를 구해 1층 전시실에 들어서니 소설 태백산맥의 집필과정과 작가의 필기구와 소품, 작품의 사회적 반향 등 관련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4년간의 취재와 6년간의 집필기간은 작가의 혼을 불태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지난한 작업이다. 이를 관람하면서 한 작가의 역사인식과 시대정신이 얼마만큼 우리사회를 정신적으로 성숙케 하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2층 전시실은 구조부터 독특하다. 벽체가 없이 공중에 떠있는 설계기법을 적용해 해방 후부터 6·25를 거쳐 분단까지의 민족사의 매몰시대를 형상화하고 있다.
문학관을 나와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장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현부자네집과 무당 소화의 집이 지척에 바라보인다. 현부자네집은 한옥에 일본식을 가미한 이색 양식의 건물로 작품에 투영된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이어서 차를 타고 읍내 중심가에 자리한 남도여관과 옛 금융조합을 살펴보았다. 남도여관은 카페로 꾸미기 위한 실내공사가 한창이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건물외관만 관람했는데 전형적인 일본가옥으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옛 금융조합 역시 소박한 조형미가 느껴지는 벽돌건물로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실내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밖에도 벌교읍 곳곳에는 작품과 맥을 같이 하는 현장들이 산재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벌교는 태백산맥 현장 답사차 찾아온 외지 관광객들로 인해 꼬막정식 식당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작품 속에는 인물 이야기뿐 아니라 벌교의 인문환경도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는데, 특히 벌교꼬막의 찰진 맛은 압권이다. 관광의 3요소인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모두 작품에서 연유하고 있다.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는 문화자산

 

이처럼 소설 태백산맥은 한 시대를 풍미한 문학작품의 깊은 감동이 배경이 된 지역에 소중한 문화자원이 되어 경제적 원천으로 승화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만일 소설 태백산맥이 탄생하지 않았더라면 현부자네집이나 남도여관이 한갓 한물간 고가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들이 문학의 힘을 빌어 되살아남으로써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있다.
2015년 청양의 해를 맞아 광주·전남은 문화융성의 기운이 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시아문화중심 도시를 겨냥한 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예향의 저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 태백산맥과 벌교의 경우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무형의 문화적 자산을 새롭게 발굴하고 재발견해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광주·전남은 비록 산업화에서는 더디었지만 유구한 문화적 지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 묻혀있는 원석들을 꺼내 깎고 다듬는 일에 우리 모두 지혜를 모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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