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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법정 스님의 향기

법정 스님의 향기
박준수 경영사업본부장·이사

가장 오래되고 특별한 인연

산사에서 온 ‘향기로운’ 편지


 

입력날짜 : 2015. 06.01. 19:39

 

얼마 전 대학 은사님이신 박광순 박사님으로부터 귀한 책 선물을 받았다. 봉투를 열어보니 은사님의 자서전 ‘나의 태평정기’가 소담스레 담겨있었다. 평소 온화하고 깔끔한 성품처럼 책 디자인 역시 고전적인 풍취가 느껴졌다.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니 80여년 삶의 자취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영암군 서호면 태백리 고향마을에 대한 회상에서부터 성장과정, 학창시절, 가족이야기, 대학 재직시절, 해외여행, 일본거주, 교우관계 등 연대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갈피마다 섬세하고 맛깔스런 문체로 빚어진 문장에서 老스승의 그윽함이 묻어난다.

자서전 내용 중 법정스님(1932-2010)과의 교분이 눈길을 끈다. 은사님의 인생에서 마주한 여러 인연 가운데 가장 오래고 특별한 만남으로 소개되고 있다.

법정스님은 생전에 ‘무소유’, ‘물소리 바람소리’, ‘산에는 꽃이 피네’ 등 주옥같은 수상록을 통해 우리 삶에 신선한 화두를 던졌다. 그러나 스님의 종교적인 삶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세속의 삶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다. 필자도 당대의 베스트셀러인 이들 책을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키웠지만 스님 개인의 이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은사님과 법정스님의 첫 만남은 1947년 목포상업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포상업학교는 훗날 학제개편으로 목포초급상과대학으로 승격되어 상업학교 4학년을 마친 학생들은 대부분 초급대학으로 진학하였는데, 줄곧 함께 학창기를 보내며 돈독한 우정을 쌓게 된다.

그러다가 대학 3학년에 올라오면서 법정스님이 출가를 결행, 각기 다른 삶의 노정을 걷는다. 하지만 두 분은 평생지기 친구로서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며 지란지교의 변함없는 우정을 이어간다. 특히 그동안 주고받은 서신이 법정스님의 내면의 편린을 엿볼 수 있어 귀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법정스님이 2001년 보낸 편지 2통을 소개한다.

“옛 친구 光淳(광순)님에게. 우리에게 노년이란 말이 실감나지 않지만, 사회통념에 따르자면 노년이라 할 수 밖에 없는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이국에서 일지라도 가르치고 탐구하는 일 쉬지 않고 이어가고 있으니 듣기도 좋고 다행한 일입니다. 일본 동네 이름들 정감이 가는 이름들 많지만 많지만 ‘제비꽃 하우스’라는 집 이름도 아름답습니다. 南佛(남불) 앙티브라는 곳에 가면 집들 이름이 번지나 호수대신 그 집만이 지닌 유별난 이름들이 있어 호감이 갔습니다. 내가 사나흘 쉬다 온 집 이름이 ‘싼타 루치아’라서 지금도 기억에 곱게 간직되어 있습니다. 봄에 꿈결에 만났던 일, 오랜만에 옛 친구들 한자리에 모이니 즐거웠습니다. 젊은날의 펄펄하던 패기 어디로 가고, 담담한 자리 茶香(다향)이 없었더라면 메마를 뻔 했습니다. 다섯 사람 중 세 사람은 차를 모르고 우리 둘이 內面(내면)의 통로가 따로 마련된 듯 싶었습니다.(이하 생략)”<2001년 초파일 다음날>

“보내주신 抹茶(말차)와 玉露(옥로) 잘 받았습니다. 두 가지 차가 일본차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귀하게 마시고 있습니다. 산중에서 일찍이 차 맛을 몰랐더라면 무슨 재미로 지낼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차를 마시면서 들추어 보는 茶書(다서) 또한 별미인 듯 싶습니다. 중국의 다서를 가끔 펼쳐보는데 명나라 허차서의 茶疏(다소)에서 點頭(점두)되는 바가 있습니다. 근래 그곳에서 출간된 읽을만한 다서가 있으면 소개해주십시오. 지리산 雲上茶(운상차) 한 통 보냅니다. 지난번에 보내드린 曉月手製茶(효월수제차)는 재고가 있으니 이 다음에 보내드리겠습니다.(이하 생략)”<2001년 여름>

은사님은 법정스님이 출가한 이후 많은 서신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특히 통영 미래사 시절에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오셨는데 수행의 어려움이 주된 내용이었다고 한다. 모두 간수했더라면 능히 책 한권 분량은 될 터이지만 스님의 부탁으로 대부분 없애버려 몹시 아쉬워하셨다. 유언으로 본인의 모든 책을 더 이상 내지 말라고 당부하신 뜻을 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갖고 계셨던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진다.

법정스님이 입적하신 지 어느덧 5년이 흘렀지만, 그분이 남기신 ‘맑고 향기로운’ 깨달음은 여전히 우리들 곁에 머물러 죽비처럼 잠든 영혼을 일깨운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에 살면서도 헐벗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 중생들에게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이야말로 귀한 마음의 양식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