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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남도의 역사를 다시 읽다

남도의 역사를 다시 읽다
박준수 기획실장 겸 이사


입력날짜 : 2016. 04.04. 20:22

전라도 정도 1천년에 즈음해 전남도와 각 시·군에서 내고장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각 시군은 1995년 지방자치가 본격 실시된 이후 역사문화를 비롯한 지역의 향토자원을 발굴해 축제를 열거나 브랜드화 시켜 지역을 홍보하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각 지역의 다양한 유무형의 자원이 빛을 보게 되었고 주민소득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영암 왕인문화축제, 진도 신비의 바닷길축제, 함평 나비축제, 곡성 기차마을 장미축제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시·군마다 향토사 연구 활발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자치단체가 경영사업을 목적으로 추진하고 결국 경제적 성과로 평가를 받는 측면이 강하다. 역사를 통해 과거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살피는 과정이 필요하다. 역사의 숨결을 제대로 바라볼 때 자긍심이 살아나고 애향심을 간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전남도와 각 시·군에서 진행되고 있는 향토사 연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전라도 정도 1천년을 앞두고 역사연구에 가장 활발하게 나선 곳은 나주시이다. 1018년 고려 현종 때 전라도가 탄생하면서 나주가 전남의 수도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나주는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무주(광주), 승주(순천) 등과 함께 큰 고을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려 건국과정에서 왕건을 후원했고, 고려 현종이 거란족이 침입했을 때(1011년) 이곳으로 몽진한 인연으로 전남을 관할하는 목사고을이 된 것이다.

물론 나주는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영산강과 드넓은 나주평야를 끼고 있어 물산이 풍부하고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잡았다. 그로 인해 원삼국시대에는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며 백제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이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유적이 나주 다시면 복암리 고분이다. 1996년 발굴 당시 필자가 취재한 이곳은 옹관묘와 석실분이 결합된 고분안에서 금동신발과 마구류가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전라도 정도 천년을 돌이켜볼 때 나주와 비견되는 곳이 바로 순천이다. 역사를 통치사나 제도사, 혹은 사건중심으로 보는 경향에 따라 이에 비켜나 있으면 주목받지 못한다. 순천은 고려 초기만 하더라도 호족 박영규를 중심으로 하는 해양세력의 영향력에 힘입어 나주 못지않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통일신라말~고려초 순천은 바닷가에 인접한 해룡산성에 치소를 두고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해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그 일대를 대표하는 거점역할을 하였다. 고려초 전국 12목의 하나였고 세곡창이 존재할 뿐 아니라 중국, 일본과 교류하는 기항지로 부상할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단행된 지방체제 개편에서 승주(순천)는 지방의 주요거점인 4도호부 8목에 들지 못하고 나주목의 아래 군현으로 강등되었다.



‘한반도의 타임캡슐’ 순천



중세시대뿐 아니라 순천은 ‘한반도의 타임캡슐’이라 할 정도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시대별로 다양한 역사문화 콘텐츠를 간직하고 있다.

선사시대 대표적인 유적이 순천시 황전면 죽내리 유적이다. 죽내리 유적은 순천-남원간 도로 확·포장 공사 구간에 포함되어 1993년 지표조사로 처음 발견되었으며, 그 후 1996년부터 1998년에 걸쳐 8개월 동안 조선대 조사단에 의해 발굴되었다. 조사 결과 네 개의 구석기문화층과 청동기 및 삼국시대 문화층이 약 5m에 이르는 지층 속에 차례로 층위를 이루며 놓여있는 것이 밝혀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마지막 간빙기에 쌓인 강물퇴적층 위에 놓인 비탈퇴적층에 들어 있어, 약 12만 5천년전 이후의 자연환경 변화 속에 선인들의 발자취가 생생히 남아있는 셈이다.

근세 유적으로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바닷가 구릉지대에 자리한 순천왜성이 있다. 순천왜성은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가장 극적인 역사현장이다. 1598년 9월에서 노량해전이 있었던 11월 19일까지 2개 월 동안 순천만의 장도와 광양만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공방전이 펼쳐진 정유재란 최후의 전투현장이며, 이순신 장군이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둔 후 전사한 유서 깊은 곳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70-80년대 서울의 달동네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순천드라마 세트장이 꼽힌다. 2006년 SBS 드라마 ‘사랑과 야망’이 촬영된 이곳은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전라도 정도 1천년을 조망할 때 순천(順天)이라는 지명 또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이 지역은 고려 초기 승주, 승평으로 불리다가 고려 후기 충선왕 때(1310) 순천으로 명명돼 오늘날까지 700년간 이어져오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지역의 향토사를 의미있게 살피는 노력을 소홀히 해왔다. 중앙집권의 영향때문이지만 스스로도 향토사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측면이 없지 않다. 전라도 정도 1천년을 맞아 우리의 뿌리를 찾는 계기로 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