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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TV와 만남

[TV속 세상] 발산마을을 다큐로 찍는다면…

[TV속 세상] 발산마을을 다큐로 찍는다면…
박준수 본사 기획실장


입력날짜 : 2016. 05.12. 19:28

광주민속박물관이 ‘광주청년, K씨의 삶’을 주제로 기획전시회를 오는 29일까지 열고 있다. 시대에 따른 청년의 역할과 의미를 조명하는 이번 전시회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70년대 방직공장 여공들이 모여 살았던 발산마을이다.

서구 발산마을은 광주의 도시화·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발산과 인접한 양동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으므로 그 풍경을 고스란히 기억의 사진첩에 간직하고 있다. 먼저 발산마을 일대 풍경을 원경으로 펼쳐보자. 발산마을은 광주천이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 서민주택들이 굴딱지처럼 밀집한 달동네이다. 농촌의 전원풍경과 도시의 골목길이 한데 어우러진 점이지대로서 초가집과 슬레이트집, 기와집, 밭이 혼재한 난개발지역이다.

이곳 거주자들은 원주민보다는 이촌향도의 물결을 타고 도시로 유입된 이주민들이 주류를 이뤘다.

그래서 대부분 세들어 사는 가구가 많고 직업도 상인, 공장근로자, 노동자, 군인, 시골 유학생 등 하층의 삶을 영위하는 계층이 다수를 차지했다.

생활상을 보면 소득이 적기 때문에 아궁이가 딸린 좁은 상하방에 한가족이 모여사는데 옷장, 라디오, 쌀통, 책상 정도가 세간의 전부이다. 부엌은 식기와 반찬을 함께 보관하는 찬장과 석유곤로, 연탄 수십장이 구색을 갖추는 정도이다.

수도는 마당 한가운데 있어 공동으로 이용하고 화장실 역시 한 두 칸을 함께 쓰는 형편이어서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이곳이 서민들의 특구로 자리잡은 배경은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근에 호남 최대 전통시장인 양동시장이 있고, 광주천 건너편 임동에는 일신·전남방직 공장이 있어 시골에서 올라온 이주자들이 생활터전으로 삼기에는 아주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싼 인건비로 섬유수출에 열을 올리던 때라 방직공장은 하루 3교대로 분주하게 돌아갔다. 그래서 공장에선 값싼 노동력이 다수 필요했고 이에따라 성인뿐 아니라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를 졸업한 10대 소녀들까지 취업하게 되었다. 공장은 이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주기위해 산업체 특별학급을 편성해 야간에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대표적인 학교가 방직공장 인근에 자리했던 사립전남중·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현재 공립으로 전환돼 상무지구로 이설했다.

방직공장 직원들은 혼자인 경우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했으나 가족이 있는 경우 광주천 건너 발산마을에 거주하는 근로자도 많았다. 그래서 교대하는 시간이 되면 하얀모자에 하늘색 작업복을 입고 공장과 마을을 연결하는 뽕뽕다리를 오가는 근로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공사판 철판을 이용해 얼기설기 만든 뽕뽕다리는 구멍이 뚫려있어 광주천 물살이 드러나 보이므로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건너게 된다. 또한 청소년들이 밀집한 지역적 특성에 따라 도심과 떨어져 있지만 공장 앞에는 이례적으로 ‘문화극장’이란 영화관이 들어서 있었다.

이처럼 방직공장과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룬 발산부락은 70년대 개발연대의 주역인 10대 여공들의 애환이 깃든 생활터전으로서 광주 역사의 중요한 상징적 공간이다.

그런데 지금 발산마을은 한편에서는 재개발의 건설현장이 용틀임을 하며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있고 한편에서는 문화마을로 보전하려는 움직임이 맞서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문화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와 스토리가 구석구석 스며 있어야 한다. 필자는 발산마을이 재개발의 소용돌이 속으로 영영 사라지기 전에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을 다큐로 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