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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리랑

일본인 가슴속에 부활하는 윤동주 시혼

[新아리랑]교토시민의 힘으로 우토로공원에 시비건립 나서
['경술국치 100주년'기획] 新아리랑
<제3부> 일본 현지에서 본 한일관계
(1) 일본인 가슴속에 부활하는 윤동주의 시혼


입력날짜 : 2010. 08.11. 00:00

핵폐기와 평화 기원전에 포스터 전시
릿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기념관에는 원폭투하 65주년을 맞아 ‘제30회 전쟁전-핵무기 폐기와 평화의 기원전’이 열리고 있었다. 여기에도 윤동주시인의 생애와 작품세계, 그리고 제3시비 건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포스터가 전시돼 시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사진=김애리기자 kki@kjdaily.com
한일병합 100년맞아 추모사업 활발
1만 2천명 서명, 당국에 3년째 청원
불멸의 문학성·억울한 희생 등 부각


본지 ‘신아리랑’ 취재팀은 지난 2일부터 7일까지 5박6일간 일본 사가현, 오사카, 교토 등 3개지역을 순회하며 한일교류와 재일교포 생활상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올해는 한일강제병합 100년, 히로시마 원폭투하 65년 등 역사상 중요한 분기점이어서 일본열도는 어느 해보다 깊은 성찰과 화해의 분위기로 가득했다. 특히 일본 언론들은 이들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8월을 맞아 특집을 마련, 원폭투하와 북방영토 문제를 자국 이해중심으로 재조명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울러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반성과 성찰의 차원에서 평화와 화해의 관계정립에 노력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한일관계는 통상 ‘가깝고도 먼 나라’로 표현돼오듯이 역사적으로 복잡한 이해관계와 미묘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어 섣불리 서술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과거의 교훈은 간직하되 협력과 상생을 통해 미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발전방향이라는 인식하에 현지 취재내용을 정리한다. /편집자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서시’로 유명한 윤동주시인(1917-1945)이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진 지 65년,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일본열도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비록 그가 식민지시대 한국시인이었지만 윤동주가 생전에 머물렀던 교토는 물론 옥중에서 타계한 후쿠오카 등 연고가 있는 지역마다 그의 흔적을 찾아 추모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여기에는 그의 시가 갖는 불멸의 문학성과 더불어 젊은 나이에 유학중에 일제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인권 차원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현재 일본에는 2개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모교 동지사대학과 그가 머물었던 하숙집터(현재 교토조형예술대학 별관)에 각각 하나씩 존재한다. 여기에 최근 ‘윤동주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시민들이 중심이 돼 우토로공원에 제3시비 건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제3 시비는 사립대학 등 사유지와 달리 공원(공공장소)에 세워진다는 점에서 교토부가 난색을 보이면서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3년째 윤동주시비 건립에 앞장서고 있는 ‘윤동주를 생각하는 모임’ 대표 곤따니 노부꼬씨(여)를 지난 6일 오후 릿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기념관에서 만났다. 평범한 일본주부인 그녀가 윤동주시인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지난 2002년 3월1일 ‘평화와 문화의 추도’ 행사에서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 시낭송을 하면서 인연을 맺게됐다.
윤동주의 시에 감동한 그녀는 이후 동지사대학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시비를 탐방하는 등 본격적으로 윤동주시인의 발자취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윤동주가 우토로공원에 교우들과 소풍와서 찍은 사진을 보고 이곳에 그를 기념하는 시비를 건립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되었다.
모교인 교토 동지사대학내 시비
윤동주의 모교인 교토 동지사대학내 하리스공학기념관과 예배당 사이 작은 공원에 세워진 시비. 우리나라를 향하고 있는 시비 주변에는 남북한과 일본을 상징하는 무궁화, 진달래, 벚꽃이 녹음을 드리우고 있다. 이우경 교우회 명예회장(오른쪽)과 재일교포 송기태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김애리기자 kki@kjdaily.com
우토루공원은 그녀의 집과 가까울 뿐 아니라 한국인들의 집단거주인 우토로 마을과 불과 3㎞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녀는 2005년 ‘윤동주시인 시비건립위원회’를 결성해 모금운동을 벌이는 한편 시비제작에 착수했다. 시비건립위원회에는 정계, 학계, 예술계, 일반시민 등 170여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한국의 함세웅신부, 백낙청 명예교수, 고은시인 등도 포함됐다.
수많은 시민의 협조로 350만엔(원화 4천800만원)이 모금됐고, 3개의 시비 설계안이 제출돼 이중 ‘한일의 가교’를 상징화한 디자인이 최종 채택돼 2007년 시비가 완성되었다. 시비에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碑)’라는 부제가 붙여졌다. 그러나 이를 우투로공원에 세우려하자 교토부 당국은 공공장소에 시비를 건립하려면 이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며 관련성을 입증할 자료제시를 요구했다.
이에 위원회가 우토로공원 인근 다리에서 찍은 사진을 제출하자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며 보다 직접적인 자료를 요구해 올해 4월8일 윤동주시인의 재판기록 공개를 교토지방검찰청에 청구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시비건립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해 1만2천명이 참여한 청원서를 교토부에 전달했다.
이후 신청 2개월만인 6월10일 검찰청으로부터 재판기록을 공개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데 이어 7월8일 사본을 입수할 수 있었다.
윤동주에 대한 재판기록 공개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7월15일 판결문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13개 언론사에서 비중있게 보도했다.
재판기록에는 윤동주가 ‘한국어로 시를 써 민족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한국독립을 도모했다’는 요지로 치안유지법 5조(독립운동)를 적용, 징역 2년을 선고한다고 적혀있었다. 또 사망 이듬해인 46년 사면도장이 찍혀있었다.
시비건립위는 재판기록을 가지고 교토부에 재차 허가를 요청했으나 이 정도로는 불충분하다며 다시 불허했다. 이에 추진위는 윤동주의 사촌형인 송몽규의 재판기록 공개를 청구해 추가적인 단서를 확보할 방침이다. 송몽규는 당시 교토대학에 재학중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윤동주를 동지사대학으로 전학하도록 하는 등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릿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기념관에는 때마침 ‘제30회 전쟁전-핵무기 폐기와 평화의 기원전’이 열리고 있었다. 여기에도 윤동주시인의 생애와 작품세계, 그리고 제3시비 건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포스터가 전시돼 시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취재팀은 그의 시비가 세워진 교토 동지사대학을 방문했다. 한국시인으로서 일본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훈훈했다.
동지사대학에 도착하자 교우회 코리아클럽 명예회장인 이우경씨(76)와 재일교포 송기태씨(교토국제학원 상임고문)가 기다리고 있었다.
윤동주 시비는 하리스공학기념관과 예배당 사이 작은 공원에 세워졌다. 시비는 우리나라를 향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남북한과 일본을 상징하는 무궁화, 진달래, 벚꽃이 녹음을 드리우고 있었다.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윤동주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우토로공원에 건립하기 위해 제작한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碑)’. 이 시비는 높이 2m10㎝에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기둥으로 연결하는 가교형태의 디자인을 보이고 있다.]/사진=김애리기자 kki@kjdaily.com
조금전 누군가 꽃을 놓고간 듯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 거의 매일 한국방문객이 다녀간다고 한다.
이곳의 시비건립은 교우회 코리아클럽의 주도로 모금운동이 이뤄져 전체비용 500만엔 가운데 파평윤씨 종친회에서 200만엔을 기부한 것을 비롯 일본, 미국, 중국인(조선족)까지 참여해 총 400만엔이 모아졌다.
시비건립 기념식은 윤동주 사후 50년되는 1995년 2월16일 옥사일에 맞춰져 거행됐다. 기념식에는 연세대 부총장을 비롯 미국, 조선족, 동지사대학 교수 등 350여명이 참석했다.
56년 법학과를 졸업한 이우경 제2대 교우회장(76)은 “윤동주시집은 남미 체코에서까지 번역되는 등 해외 6개국에서 소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시비가 있는 교토예술조형대학을 찾아가는 길에 윤동주가 체포된 경찰서가 있었다. 동지사대학에서 불과 200m거리에 위치한 경찰서는 1943년 7월 윤동주가 체포된 곳으로 1964년 목조건물을 헐고 재건축되었다.
윤동주가 하숙했던 아파트가 있던 자리는 현재 교토예술조형대학 별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건물 화단에 조촐하게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당시 조선유학생 본부가 있어 자연스레 조선유학생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또한 교토대 재학중인 사촌형 송몽규가 근처에 거주하고 있어 자주 연락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4-9월까지 6개월간 릿교대학을 다니다 10월 동지사대학으로 옮긴다.
릿교대학은 ‘윤동주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한편, 윤동주의 시는 2001년 8월 일본고교 교과서 ‘현대문’에 실려 학생들에게 가르쳐지고 있으며, 교토부 발행 인권교육자료에도 소개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인권의 상징적 인물로 일본인의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다.
교토/글=박준수기자 jspark@kjdaily.com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는 죽지 않았다”
곤따니 노부꼬 윤동주를생각하는모임 대표

“우리가 윤동주시인을 기억하는 한 그는 죽지않았습니다”.
‘윤동주를 생각하는 모임’ 대표 곤따니 노부꼬씨(여)는 한일병합 100년인 올해 윤동주시인의 시비를 우토로(宇治)공원에 꼭 건립하고 싶다고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이어 “교토부가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만큼 교토지사는 하루 속히 시비건립을 허가해주길 기대한다”고 촉구했다.
평범한 일본주부가 어떻게 한국시인의 시비건립에 앞장서게 됐느냐고 묻자, 그녀는 “일본정부가 해야할 일이지만 시민의 힘으로도 할 수 있지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시비를 세워 후대에 남기는게 우리의 책임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3년동안 보관해온 시비를 반드시 건립하고 싶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녀는 “인권교육의 의식을 높이기 위해 시민의 자발적 행동이자 순수한 시민운동으로 출발했다”면서 “돈도 없고 땅(부지)도 없었으나 이 운동을 통해 많은 시민들에게 윤동주 시인을 알리는 게 계기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곧바로 세워졌다면 재판기록 공개나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못했을 것이라며 그동안의 운동과정이 헛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학자를 통해 공개신청을 하는게 어떻느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시민운동으로 진행하는 게 더욱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편, 그녀는 “당시 교토는 사촌형인 송몽규가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공산주의운동이 활발한 지역으로 일본경찰이 이를 주목하던중 윤동주가 송몽규사건에 휘말려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조심스럽게 견해를 피력했다.
아울러 송몽규와 동일 사건인데 윤동주의 재판과정은 전혀 달라 일본재판부에서도 다시 연구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박준수기자 jspark@kjdaily.com         박준수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