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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일병합 100년, 기억과 화해

한일병합 100년, 기억과 화해
박 준 수 부국장 겸 정경부장


입력날짜 : 2010. 08.17. 00:00

필자는 8월 첫주 일본에서 한주를 보냈다. 특집기획 ‘경술국치 100주년-신아리랑’ 취재차 사가현, 오사카, 교토를 순회하며 한일교류와 재일교포 활동상을 살펴보았다.
일본열도는 섭씨 35도를 웃도는 폭염속에 종전 65년을 맞아 히로시마 원폭피해, 북방영토 문제 등 자국의 역사적 현안을 국제사회와 자국민들에게 환기시키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NHK 등 주요방송들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을 즈음해 특집을 마련, 피해자들의 참상을 비추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또 러시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북방영토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며 환원의지를 드러냈다.
특히 히로시마 원폭과 관련 일본은 ‘가해자’인 미국에게 사과수준은 아니더라도 모종의 반성적인 행동을 보여주길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 언론들은 비핵선언을 한 오바마대통령이 원폭피해지역인 히로시마를 방문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이번 8월6일 원폭피해 기념식에는 최초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존 루스(John Roos)주일 미국대사가 참석하는 등 일본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대한 의식이 치러졌다.
그러나 36년간 국권을 탈취하고 말과 성씨마저 빼앗은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한 진지한 반성은 별로 보여주지 못했다. 간 나오토 총리가 예전 수준의 사과담화를 발표하고, 각료 전원이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안하는 것으로 통과의례를 마쳤을 뿐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와 민간에서 한국 식민지배의 성찰과 반성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 윤동주시인의 시비를 우토로(宇治)공원에 세우기 위해 3년째 교토부에 청원운동을 벌이고 있는 주부 곤따니 노부꼬씨가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녀는 ‘윤동주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어 시비제작비 모금에 나섰고, 교토부가 시비건립에 난색을 표하자 윤동주 재판기록 공개를 요구하는 한편 1만2천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는 등 한국시인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냈다.
그녀는 “우리가 기억하는 한 윤동주는 죽지않았다”며 “시민의 힘으로 한일병합 100년인 올해 반드시 시비를 건립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또한 오사카에서 만난 보험사업가 토루 아오키씨는 한국인 못지않게 한국을 깊이 이해하고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일본에서 매년 11월에 열리는 왕인축제를 22회나 참관하고, 영암 왕인축제도 13회나 방문하는 등 한국에 대한 애정이 유별난 일본인이다. 그는 필자에게 “서대문형무소(일제시대 독립운동가를 감금·고문한 현장)에 가보았느냐”고 물으며 “안 가보았다면 꼭 가보라”고 권할 정도였다. 그는 5번이나 방문했다는 것이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정유재란을 일으킨 본거지인 가라츠(唐津)는 과거 역사의 성찰의 차원에서 화해의 제스춰를 보여주고 있다. 도로표지판과 공공기관 안내판이 한글로 표기되었고, 나고야성박물관에는 한일교류전을 상시적으로 열고 있으며, 일한우호교류센터를 설치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은 한일문화교류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을 보여준다. 시내 중심 나까노시마(中之島)에 자리한 미술관은 기증자의 수집품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재일교포 이병창씨가 기증한 500여점의 컬렉션이 한국도자기의 진수를 일본인과 세계인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일본대중과 지자체 차원에서는 화해의 무드가 확산돼가고 있지만 아직 일본정부와 지식층은 여전히 100년전의 기억속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있는듯하다.
오사카에서 만난 한 한국인사는 “일본 대중은 한류붐에 매력을 느끼고 한국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일본 지식층은 아직도 과거 ‘조선’으로 상징되는 보수적인 사고에 젖어 있다”고 꼬집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 벌써 한 세기가 흘렀지만 식민지배의 상흔은 아직도 한반도 곳곳에 깊게 남아있다. 미씨비시 근로정신대 ‘99엔 보상’이 대변하듯 일본은 자국의 피해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가해행위에 대해서는 정당화하는데 급급한 모습이다.
일본이 분명 과거 행위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피해자의 입장에서 아픔을 헤아릴 때 진정한 화해의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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