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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리랑

(8) 교포노인들의 안식처 ‘고향의 집’

[新아리랑] 조국 환경과 비슷한 노인홈 ‘일본판 공생원’
['경술국치 100주년'기획] 新아리랑

<제3부> 일본 현지에서 본 한일관계
(8) 교포노인들의 안식처 ‘고향의 집’


입력날짜 : 2010. 09.09. 00:00

포근한 ‘한국의 정’ 가득한 터전
교토 강변에 자리한 ‘고향의 집’은 과거 교포들이 무허가 집단촌을 형성한 ‘동구조 0번지’ 일대로 애환이 서린 곳이다. 현재는 포근한 고향의 정으로 교포노인들을 껴안는 실버복지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사진=김애리기자 kki@kjdaily.com
기금 모아 교토 등 4곳 요양 시설 운영
윤기 이사장, 日최고 복지모델 현실화

세계 최장수국의 하나로 꼽히는 일본은 고령인구 증가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겪고 있다. 10조엔대의 연금 적자 누적과 노인복지 예산지출 증가는 물론이고 홀로사는 노인에 대한 무관심과 소외문제가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취재진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언론에서는 100세 이상 노인의 소재파악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자식들이 연금수당을 계속 수급받기 위해 사망신고를 미루거나, 심지어 집안에 매장하는 등 패륜적 행동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전후 65년이 흐르면서 50만 재일교포 사회도 점차 고령화시대를 맞으면서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이들 역시 자식들과 따로 헤어져 살면서 홀로 임종을 맞는 ‘독거사’(獨居死)가 잇따르고 있다.
이런 고령화시대 문제를 포근한 고향의 정으로 껴안아 실버복지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사카이시, 고베, 오사카, 교토에 ‘교향의 집’을 설립, 외롭게 노년을 맞고 있는 재일교포를 돌보고 있는 윤기이사장(67).
윤 이사장은 목포공생원을 세운 윤학자여사(68년 작고)의 아들로 교포들이 밀집한 지역에 ‘고향의 집’을 세워 한국형 노인복지의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교토 강변에 자리한 ‘교향의 집’은 과거 교포들이 무허가 집단촌을 형성한 ‘동구조 0번지’ 일대로 애환이 서린 곳이다.
윤 이사장은 1982년 일본으로 건너와 ‘한·일이 협력해 아시아 고아를 돕자’는 취지로 공생원 동경사무소를 개설했다.
하지만 윤이사장은 당시 일본사회의 여론을 들끓게 한 고독사 문제를 접하고 재일교포들을 보살피기 위해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겠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교토에서 노인이 고독사한 지 13일만에 발견되는가 하면, 오사카에서는 6개월만에 발견되기도 하는 등 노령화사회의 그늘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민단에서 조사한 결과 홀로 사는 교포노인이 1,412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논단을 통해 재일교포들이 생활습관, 취미, 문화가 다르다며 새로운 접근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민 기부자 명단
순수한 시민의 힘으로 탄생한 ‘고향의집’은 사카이시에서만 7천명이 기부하는 등 후원자들이 속출하면서, 11억8천만엔이 모아졌다. 사진은 기부자 명단. /사진=김애리기자 kki@kjdaily.com
이처럼 재일교포 독거사문제가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가운데 윤이사장은 1983년 고향에 못가고 처량하게 우는 교포들을 보면서 “한을 풀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울러 두 나라 문화가 필요한 재일교포들을 위해 조국환경에 가까운 노인홈 시설을 만들자는 뜻을 세우고 대대적인 모금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 당국에서는 재일교포뿐 아니라 다른 외국인들도 덩달아 이같은 모금운동을 하겠다고 신청하면 골치아프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이에 윤이사장은 ‘복지가 리더다’라는 논리를 가지고 당국을 설득해 결국 ‘국제허가 1호’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1만엔씩 3만명이 기부에 참여하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순수한 시민의 힘으로 ‘고향의집’ 건립운동에 나서 사카이시에서만 7천명이 기부하는 등 후원자들이 속출하면서, 희망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모금운동을 통해 11억8천만엔이 모아지자, 15억엔을 차입하고 5억9천400만엔은 일본 정부지원을 받았다.
‘동구조 0번지’를 장미꽃이 피는 곳으로, 일본을 뛰어넘어 아시아 최고의 복지모델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꿈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이 모금운동에는 재일교포뿐 아니라 소설 ‘빙점’으로 유명한 미우라 아야꼬를 비롯 올림픽 유도 금메달 리스트 야마시다 다이유 등 수많은 일본 명사들도 참여했다.
이렇게 싹이 튼 ‘고향의집’은 현재 사카이(90명), 고베(70명), 오사카, 교토(160명) 등 4곳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수용자의 60% 가량이 교포이다.
이곳 ‘고향의 집’에는 헬퍼(helper)판견센터, 주간보호소, 홈헬퍼 상담소, 고령자 종합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그는 앞으로 동경, 후쿠오카, 히로시마 등 6개소에 ‘고향의 집’을 건립, 복지의 손길을 더욱 확대해나간다는 구상이다. 이와관련 그는 소액기부자들의 후원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 정신적인으로 큰 힘이 되고 있다며 지난 7월1일 동경사무소 개설에 이어 신주꾸에 ‘고향의 집’ 개원을 추진중이라고 계획을 설명했다.
그는 지난 9월1일 교토 ‘교향의집’에 문화홀을 세우고 극작가 한운사의 이름을 빌려 ‘한운사홀’ 명명식을 가졌다. ‘한운사홀’로 명명한 것은 고국과 문화교류의 징표로서 오래 간직하기 위한 취지이다.


“목포에 공생마을 지으러 가겠다” 윤기 이사장

‘나를 키워준 곳’ 꼭 보답 고향에 돌아가 봉사활동 2012년 ‘고아의 날’ 선포


“목포 대반동에 공생마을을 지으러 가겠습니다”
1982년 목포를 떠나 30년 가까운 세월을 어머니의 나라 일본에서 살고 있는 윤기 이사장(67)은 언젠가는 나를 키워준 목포로 돌아가 꼭 보답하고 싶다고 진한 고향의 정을 내비쳤다.
일본에서 나름대로 뿌리를 내렸지만 ‘수구초심의 정’에 목말라 하는 그는 장차 목포로 귀향해 공생원 소유 고하도 땅에 골프장을 갖춘 노인홈을 비롯한 행복랜드를 건설, 고향주민에게 봉사할 생각이다.
윤 이사장은 일본 고치현이 고향인 어머니는 68년 숨을 거두면서 “매실장아찌가 먹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셨다며 자신 역시 고향의 그리움이 간절하다고 표현했다.
아울러 그는 2012년 10월31일 어머니 윤학자여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세계 어린이를 생각하는 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구상을 밝혔다.
이 행사에는 서울 유니세프가 참여하고 일본 정·재계인사를 포함, 일본인 3천명과 함께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그리고 ‘세계 고아를 생각하는 날’ 제정을 선포할 계획이다. 특히 목포권 네트워크를 조직해 고향발전에 힘을 보탤 생각이다.
그는 목포공생원이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공존하면서 복지의 리더로서 묵묵히 역할을 다해왔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회생했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 6.25때 아버지 윤치호마저 행방불명되고 공생원이란 이름때문에 빨갱이로 오해받아 수난을 겪자 1960년대 ‘유달원’으로 개명할 생각도 가졌다고 한다.
이어 1970년대 반일감정이 드높았던 시기, 일본여자라는 이유로 시설을 빼앗기는 수난을 당하면서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사업에 전념했다고 회고했다.
윤학자 여사는 일본 여성으로 한국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훈했고 첫 목포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언론들은 ‘반공, 반일넘은 사랑의 역사를 썼다’며 추모했다고 그는 전했다.
그는 현재 ‘깡통인생-나의 인생 welfare’ 자서전을 집필중이다.
한편 윤이사장은 이러한 복지사업에에 헌신한 공로로 2009년 명예목포시민 추대됐으며, 올해 자유도시 사카이평화대상 제2회 평화공헌대상 수상자로 선정돼 오는 10월28일 수상한다.


교토/글=박준수 기자 jspark@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