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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리랑

(4)日 도자문화의 원류 이삼평

[新아리랑]조선기술 도입 ‘아리타’ 스타일 꽃피워
['경술국치 100주년'기획] 新아리랑
<제3부> 일본 현지에서 본 한일관계
(4)日 도자문화의 원류 이삼평


입력날짜 : 2010. 08.18. 00:00

도자기 제작 시연
14대 이삼평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기술로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사진=김애리기자 kki@kjdaily.com .
사후 陶祖 추앙 신사·기념비 세워
400년 전통의 세계적 도요지 명성


취재진은 사가현 아리타에서 일본도자기 문화의 원류를 꽃피워낸 이삼평의 발자취를 둘러보았다.
일본도자기의 원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는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 충청도 금강에서 나베시마군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왔다. 당시 왜는 유학자, 지식인, 기술자 등 수만명을 붙잡아 왔다. 이때 수백명의 조선도공이 포로의 대열에 포함됐다. 왜군이 조선도공들을 대거 데려온 이유는 영주들이 도자기산업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차문화가 발달해 다기(茶器)가 필수품이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도자기기술이 중국, 한국에 비해 크게 낙후돼 있었다.
이삼평은 일본에 건너와 처음에는 나베시마 나오시게 영지인 사가시내에서 머물렀다. 이후 타구 나가토노카미에게 맡겨져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뜻대로 도자기를 구울 수 없게 되자 좋은 재료(요석)를 찾아 사가현 일대를 탐색한 끝에 1616년 아리타 동부지역에서 양질의 요석광산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이즈미야마 도석광산으로 일본도자기의 발상지이다.
이삼평은 도석광과 땔감, 물이 풍부한 이곳에서 텐쿠타니요를 쌓아올려 40여년간 아리타도자기의 꽃을 피우게 된다. 이때 그는 일본에 처음 녹로(로꾸로)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도자기 기술은 중국이 앞서 있어 처음에는 그림을 그대로 베끼는 등 중국 경덕진 기술을 모방하는 수준이었다.
1600년대 이삼평이 활약한 초창기 아리타도자기를 ‘초기 이마리’라 부른다. 조선도공들은 이즈미야마 도석광을 발견하기 이전에 아리타의 서부지구에 있는 코미조 요나 텐진모리요에서 카라츠계 도기와 자기를 동시에 굽고 있었던 것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다.
전통가옥보전지구
아리타 전통가옥보전지구는 도로양편에 150여개의 도자기 판매점이 번창하고 있다. 도로 뒤편에는 가마 100여개가 밀집해 있는데 집마다 흙담장이 둘러쳐 있어 한국의 여느 마을을 연상시킨다. /사진=김애리기자 kki@kjdaily.com
당시의 아리타 도자기는 지금과 같이 화려한 인상이 아니고, 여백을 잘 이용한 소박하고 분위기가 있는 것이 많았다. 그 제작에는 조선인 도공들의 기술과 일본인이 좋아한 중국적 도안이 융합되어 아리타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도자기 생산이 중단되면서 아리타 도자기가 수출길이 열리게 됐다.
그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고향 긴코우도(金江島)라는 지명에서 딴 ‘카나가에 삼베에’라는 일본명을 얻게된다.
이삼평의 도자기 제조기술은 가업으로 이어져 현재 14대 이삼평(49)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4대 이삼평과 아리타관광정보센터 공무원 후카에 료헤이씨의 안내로 이삼평 도자기의 탄생지인 이즈미야마(泉山)자석장을 찾았다.
야산 군데군데 커다란 동굴이 여러개 뚫려 있어 채굴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석장은 1980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14대 이삼평(카나가에 쇼헤이)은 지금은 주로 구마모토 아마쿠사에서 요석 채취한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일본자기의 원점으로 회귀하는 경향따라 다시 아리타 요석을 조금씩 채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리타 요석은 철분이 많이 함유돼 있지만 끈적거림이 적은 것이 특징이다.
이삼평은 1655년 사망한다. 3년후 그를 기리기 위해 1658년 陶山신사가 세워졌다. 사후 마을에 있던 용천사의 과거장(過去帳)에 계명(戒名)이 기록되었고 텐구다니가마 가까이에 묘비가 세워졌다. 이는 당시 일본으로서는 아주 드문 예우라 할 수 있다.
이어 도석발견 300년이 되던 1916년 도조 이삼평비 건립이 결정돼 1918년 도산신사 뒤편 아리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기념비가 우뚝 모습을 드러냈다. 이삼평14대손은 “도조 이삼평비가 신사보다 높은 위치에 세워진 것은 그만큼 조선의 위상을 높게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골드 위크’ 5월4일이면 도조제가 거행된다. 아리타 도자기축제는 일본전역에서 100만명이 그의 기념비와 도산신사를 보기 위해 몰려든다. 도조 이삼평비가 서 있는 산 건너편에 이삼평의 가마터가 있는 천구계곡이 있고, 이곳에 묘가 함께 존재한다.
아리타의 조선도공 후예들은 매년 6월1일이면 고향을 그리며 망향제를 올린다고 한다. 인구 2만명의 산골마을 아리타는 100개의 요와 150여개의 판매점이 번창하고 있다. 전통가옥보전지구로 지정된 이곳 큰길에는 도자기 상점들이 즐비하고, 뒷골목은 가마가 밀집해 있다.
도조 이삼평 기념탑
도석발견 300년이 되던 1916년 도조 이삼평비 건립이 결정돼 1918년 도산신사 뒤편 아리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기념비가 우뚝 모습을 드러냈다. 신사보다 높은 곳에 설치한 것은 그 만큼 이삼평을 높이 평가한 것이라고 한다./사진=김애리기자 kki@kjdaily.com
이곳이 가마가 밀집해 있는 것은 도자기 굽는데 필요한 요석, 땔감(적송), 물 등 3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뒷골목 주택에는 일본에는 없는 한국식 흙담장이 눈길을 끈다. 마치 담양의 어느 마을에 온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사가현(아리타)/글=박준수기자 jspark@kjdaily.com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도자기 매개로 한일문화교류 앞장”
‘14대 이삼평’ 가나가에 산베에씨

“조선도공 이삼평의 후손으로서 도자기 제작활동을 통해 한일문화교류의 가교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14대 이삼평’ 가나가에 산베에(49)씨는 초창기 조선 도공들의 생각과 기술을 되살리고 이삼평의 자손으로서 정진하는 모습을 지켜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2016년 아리타도자기 창업 400주년을 맞아 한일도자기 문화의 계승자로서 400년의 시간을 넘어 새로운 감성으로 전통도자기를 현대에 접목시킨 도자기 제작활동을 통해 양국의 문화교류에 앞장서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어 선인도공들에 의해서 발전했던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앞으로의 번영을 기대하며 2016년에 성대한 사업이 계획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관련 “디자인이 심플한 것이 특징이다”고 언급하고 “예술공예품, 생활도자기를 주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그가 만든 작품은 전시회에서 판매되거나 상류층에 주로 공급되는데, 단순한 디자인 때문에 노인층이 선호한다고 덧붙였다. 제작공정에 대해서는 예전에는 전통방식의 노고리가마를 사용했으나 노후돼 현재는 가스가마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오는 11월30일부터 내년 2월6일까지 진주박물관에서 열리는 ‘임진정유왜란 피랍인 실상’ 주제 국제교류전에 참가할 예정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 전시회에는 간양록, 매창문집 등 피랍인이 남긴 기록을 통해 납치경위, 생활상, 탈출과정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 도조 이삼평이 일본으로 붙들려간 동기와 일본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생활하는 과정이 생생히 소개될 예정이다


/박준수기자 jspark@kjdaily.com         박준수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