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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자작시 해설-강물은 그리움을 향해 몸을 누인다

●자작시 해설

 

영산강은 그리움을 품고 흐른다

 

박준수

 

강물이 속절없이 흘렀던 것은 아니다
삼백리 남도길을 그냥 내달렸던 것은 아니다
담양 추월산에서 목포 하구언까지
굽이굽이 땀방울이 맺히고 피눈물이 고이고
진양조 여울장단이 아프게 아프게 스며든
목매임의 속울음으로 흐른 것이다
새벽 몽탄나루 물안개가 산허리까지 감기는
겨울 여울목에서
이국의 새떼들이 푸드득 동천(冬天)을 가르며
날아갈 때
하얀 눈발이 옛 추억처럼 시린 가슴에 파고들어
그리움으로 젖어들 때
갈대 사이로 침잠하는 노을을 바라보면
강심(江心) 깊이 흐르는 시간은
아득한 수 만년의 역사
물굽이 거슬러 거슬러 가는 곳이 어디랴
강물도 탯자리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알까
억겁의 세월을 바쳐 저 만치 다가간 유년의 제단 앞에
강물은 그리움을 향해 몸을 누인다.


<해설>

 

강물의 쉼없는 물결은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다가가는 몸짓

 

강은 인류의 삶과 오랜 시간 궤를 같이 해왔다. 원시인들이 주로 생활한 터전도 강변이다. 강은 물을 구할 수 있고 물고기를 잡아 허기를 달랠 수 있어 인간에게 최적의 생존환경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강 주변지역에 역사유물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순천시 황전면 죽내리 유적이다. 죽내리 유적은 순천-남원간 국도 확·포장 공사 구간에 포함되어 1993년 지표조사로 처음 발견되었으며, 그 후 1996년부터 1998년에 걸쳐 8개월 동안 조선대 조사단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섬진강의 한 지류인 황전천 유역을 둘러싼 소규모의 분지 속에 들어있는 형국이다.
이 시는 필자가 1996년 문화부기자 시절 취재한 순천 황전면 죽내리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얻은 영감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곳은 1만여년 전에는 강이 흘렀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강물이 흐르는 황전천과는 직선거리로 약 80m쯤 떨어져있는 곳이다. 당시 조사단장인 이기길 조선대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옛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조사 결과 네 개의 구석기문화층과 청동기 및 삼국시대 문화층이 약 5m에 이르는 지층 속에 차례로 층위를 이루며 놓여있는 것이 밝혀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마지막 간빙기에 쌓인 강물퇴적층 위에 놓인 비탈퇴적층에 들어 있어, 약 12만 5천년전 이후의 자연환경 변화 속에 선인들의 발자취가 생생히 남아있는 셈이다.
1만년의 시간의 마력이 강줄기를 저만치 옮겨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강도 자신이 태어난 탯자리가 있고 자라난 고향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강줄기를 조금씩 조금씩 끌어당긴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지리학에서는 오랜 시간 여러 가지 자연현상이 겹쳐서 만들어진 결과물로 분석하겠지만, 나의 문학에서는 그리움으로 풀이하고 있다. 어느 시인은 ‘그리움은 흐르는 강이다’고 노래했다. 이 은유적 표현을 뒤집어 보면 ‘흐르는 강은 그리움이다’ 로 치환된다.
강물이 쉼없이 제 몸을 부딪혀 이르고자 하는 그리움의 발원지는 어디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들과 부대끼면서 닿고자 하는 어떤 이상향과 같은 곳은 아닐까. 이 시는 강물의 쉼없는 물결이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다가가는 몸짓이듯이 인간의 마음도 누군가를 향해 흐르는 그리움의 물결이 아닐까 하는 은유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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